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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이걸 Sep 19. 2024

나의 아름다운 남편

속마음 표현못하는 대구댁의 진심

24살에 결혼을 했다.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이른 나이의 결혼이었다.

나를 데리고 살다 보니 나의 내면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꾹꾹 참다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을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일명 포기 이기고 하고 도피이기도 한듯하다.


어쩜 나의 20대 초반 이른 결혼은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도피가 아닐까 한다. 그 선택은 부모님 집과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살아가며 내가 왜 이럴까? 하는 내면의 심리를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걸 여러 번 느낀다. 그런데 지금 마흔이 넘은 나를 돌아보며 좋은 영향력으로 나를 조금이나마 어른답게 살게 해 준 건 남편이다.


남편은 동네에 슈퍼 하나 없는 시골 출신이다. 시댁 부모님도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다 남편이 중학생 때 포항으로 이사 오셨다. 난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논밭 구경은 해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 남편에게 난 많은 걸 배웠다.


첫째 자연과 동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겼다. 남편이랑 산에 가서 캠핑을 한 적이 있다. 시골 출신 남편에게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남편은 걸어가며 구멍을 발견하면 쥐구멍인지 뱀 구멍이 인지 확인해 보며 우리 가족이 위험해 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는 자연이 마냥 아름답다는 환상에 젖어있던 나에게 현실적인 자연과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게 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둘째 마냥 기다려주는 사랑을 배웠다. 그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눈물을 보이고 복수심에 불타 분풀이를 해야 직성에 풀렸다. 그런데 그는 내가 미워질 행동을 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잘못해도 기다려 주었다. 그건 자녀들에게도 똑같았다. 난 둘째가 걷는 걸 싫어하는 게 불만이었다. 자꾸 걷고 뛰어다니며 운동을 해야 더 건강해질 거라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런데도 그는 3살, 5살, 7살이 된 딸이 걷다가 안아달라고 하면 번쩍 안아서 안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 사춘기가 와서 방문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닫은 아들에게도 한없이 기다려주었다. 난 아들에게 소리를 빽빽 질렀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며 말이다. 그런데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려고 했던 나의 방법보다 그냥 기다리며 위로하고 힘내라고 토닥여준 남편의 행동이 맞았다. 아이들은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화를 분출하고 제대로 살라고 지시한 것 때문에 더 늦게 돌아왔다. 내 맘속의 불안과 우울도 그의 사랑으로 천천히 회복되었다. 내가 부모님과 몇 년씩 연락을 하지 않아도 남편은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당신 마음이 풀리길 기다리며 나를 위로했다.


셋째 한결같은 마음이다. 우린 올해 결혼 20주년이다. 결혼한 지 오래되면 당연히 서로에 대해 소원해질 수 있다. 사랑도 어쩜 식을지도 모른다. 여느 부부와 다름없을지 모르지만 그는 연애 때에도 신혼 때에도 크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고 (사실 20년 살면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받아본 적이 없다.)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표현하지 않아서인지 지금도 결혼초랑 똑같다. 그의 마음 표현은 옆에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주말이면 나의 옆을 지키고 함께 있는다. 그리고 밤에 둘이 이불 위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있다 보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기대고 싶은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는 마음을 보며 나는 사람들을 믿고 좋아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고 현재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생각과 행동의 씨앗은 남편이 나에게 준 사랑 덕분이다. 지금도 난 오늘 죽어도 별로 여한이 없을 만큼 삶에 의미를 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를 만나 지금 살아간 세월의 흔적들을 생각하고 있다보면 그와 하루 더 살아 보고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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