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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잔상

흔한 것의 오리지널리티

by 조유리

나의 이름은 ‘조유리’다. 성(姓)을 제외하면 아마도 주변에서 흔히 들어봤을 이름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세대를 이어 여자 아이돌 가수 중 많은 ‘유리’들이 있다. ‘쿨’의 유리, ‘소녀시대’의 유리가 있었고 최근 알게 된 ‘아이즈원’이라는 그룹의 유리라는 가수는 심지어 나와 성까지 같았다. 고등학생인 내 아이의 친구들 중에도 유리를 종종 발견한다. 세대를 넘나들며, 참으로 흔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흔하기도 하지만 특정한 이미지를 풍긴다. ‘유리’라는 여자 아이돌 가수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듯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귀엽고 예쁘고 발랄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오십 평생 내 이름을 ‘유리’라고 소개하는 것이 쑥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름이란 그 소유자와 어울리는 느낌이 나야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할 텐데 ‘유리’는 나와 그리 닮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왠지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애교도 많고 항상 웃으며 다닐 것 같지만 나는 외모부터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고 성격 또한 무뚝뚝하고 무심한 면이 있다. 예전부터 어떤 사람이 내 이름을 먼저 듣고 나를 실제로 만나면 그 괴리감에 실망해 버릴 것 같아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자꾸 불러줄 테니 이름대로 성장하라는 뜻인데 나는 내 이름의 발음이나 풍기는 이미지대로 성장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 물론 내가 ‘유리멘털’인 것만 빼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졌다는 어색함을 느끼며 살아오다 이름에 좀 더 당당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유리’라는 이름이 해외에서도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다. 일본 여성들 중에도 이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고 일본어로 나리꽃 혹은 백합도 유리라고 발음된다고 했다. 러시아에는 유리라는 이름이 ‘농부’라는 뜻을 가진 남성 이름으로 쓰이고, 이미 내 어린 시절, 이름으로 놀림받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이스라엘 출신 마술사 ‘유리 겔라’도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다양한 뜻으로 다양한 이들에게 쓰이는 국제적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발랄하고 귀여운 여성적’ 이미지는 유리라는 이름의 단면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생긴 그대로 나만의 ‘유리’로 살아가면 되지, 이름의 이미지로 틀을 만들어 그에 맞지 않는 자신에 대해 민망해하거나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유리가 원조냐’를 따진다고 해도, 이미 50대에 들어선 내가 그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다른 어린 ‘유리’들보다 내가 먼저 ‘유리’가 되었으니 굳이 따진다면 유리라는 인간으로서의 저작권은 나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나보다 더 연세가 많은 유리님들이나 고대 ‘유리왕’까지 언급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사실 내 이름 ‘유리’의 속뜻에는 그 자체로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보통 이런 이름은 한자 없이 한글로, 단어의 예쁜 어감을 살려지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내 이름에는 나름 아버지가 많은 고민 끝에 찾아 맞춘 한자 뜻이 있다. 넉넉할 유(裕), 배 리(梨)를 써서 배나무에 열매가 많이 매달린 풍경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부모님이 생활고를 이겨보려 처절하게 노력했던 시절, 부디 배곯지 말고 넉넉한 부를 누리며 살라는 의도였다. 아버지가 기대한 것이 어느 정도의 ‘넉넉함’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유복한 어린 시절과 적당히 원하는 것 먹고사는 현재의 생활에 이름 덕이 있지 않겠나, 싶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가 정성스레 지어준 이름을 가지고, 애교는 없고 무심한 나만의 스타일로 잘 살아가고 있다.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승옥의 또 다른 단편소설 <생명연습>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략)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 새 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흔하디 흔한 ‘유리’라는 이름이 가진 통상적인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같이 단단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사실 그 어떤 ‘유리’인들 오리지널리티가 없겠는가. 인간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이 어떤 능력이 특출 나거나 인성의 수준이 고결하고 우아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거대한 성곽의 정원이든 지하실이든 그 안에서 인생의 지향점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두고, 남의 모습을 모방하고 닮으려 하기보다 더 나다운 자신이 되려는 진실된 노력만 담겨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 어떤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든 나만의, 유니크한, 독창적인 ‘자기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인생 하반기를 ‘유리’로서 당차게 살아보려 마음먹은 최근, 학교 체험학습을 가던 둘째 아이가 ‘길에서 엄마를 봤어’라며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한 마을 입구의 큰 표지석에 큰 글씨로 ‘유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평촌리’ ‘소길리’처럼 마을 이름이 ‘유, 리(里)’임을 표시한 것 같았다. 이제 사람 이름도 모자라 마을 이름도 유리라니 그야말로 흔한 이름이군! 뭐, 할 수 없다. ‘흔한 것의 비애’조차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반가움’으로 승화시킬 수밖에. 그 또한, 나만의 오리지널리티이며 ‘자기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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