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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리 Jan 14. 2020

몸매와 예민함의 상관관계

“헉, 허벅지 좀 봐!”


남편의 말이었다. 누구의 허벅지를 말하는 걸까? 내 허벅지? 설마. 아무리 여자 마음 모르는 답답한 남자지만 내게 그랬다가는 후사가 두려울 것임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TV 속 배우나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한 외모 비하적 발언이었을까?


누가 들어도 기분 나빴을 저 감탄사를, 남편은 난생처음 품에 안은 자신의 첫 아이에게 내뱉었다.


오랜동안 진통하며 힘겹게 아이를 출산한 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나에게 남편의 저 한 마디는 놀랍도록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아빠란 사람이, 아무리 아빠 노릇은 처음이라지만, 딸내미를 본 첫마디가 허벅지 얘기라니. 저게 할 소린가, 싶었다.




3.2kg의 정상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는 유난히 다리가 통통했다. 돌 전까지 흔히 통통한 아기와 비유하는 미쉐* 타이어 캐릭터와 비슷했다. 그리 많이 먹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참 건강하게 자랐다. 커가면서 식탐도 많았고 먹는 양도 많았다. 어디서든 조용히 잘 먹었다. 가끔 어려운 손님이 오셔서 과일을 깎아냈는데 쪼르륵 달려와 제 입으로 먼저 가져가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아이의 말이 트이기 전까지 나는 아이가 참으로 수더분하고 털털한 성격일 줄 알았다. 자주 우는 것도 그저 아기여서 그렇지, 예민한 성격 탓이라 보지 않았다. 아이는 주는 대로 잘 먹었고, 기저귀도 빨리 뗐으며 말도 그리 느리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보통’ 상태로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아니 아이를 알아갈수록 음식을 잘 먹는 것 말고는 수더분한 면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분리 불안 증세가 심해 아침에 유치원에 등원할 때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내내 거의 매일 일어난 일이었다.


익숙한 공간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 외출 한 번 하려고 하면 한참 동안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재밌는 것 보러 가자며 꼬시고 달래야 겨우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막상 외출을 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4살쯤 되었던 어느 날 온 식구가 외식을 하던 두어 시간 동안 소변을 보러 10번 이상 화장실에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요로감염을 의심하고 진료를 받았지만 전혀 그런 병세 없이 그저 심리적인 불안으로 그랬던 거였다. 밥만 먹으려고만 하면 ‘쉬 마렵다’고 말하는 아이 때문에 히스테리가 생길 지경이었다.

 

초등 고학년이 되어서도 혼자 자는 것은 무서워한 아이는 혼자 자는 것에 겨우 익숙해진 다음에도 자기 전에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며 방 전체를 점검했다. 특히 가방이 열려있으면 창문으로 귀신이 들어와서 가방 속의 물건을 가지고 갈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이 아이가 특별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여기기도 했다. 우리 집은 아파트 10층이라 귀신도 높아서 못 올라온다고 위로하기만 했지만.

 

남들이 볼 때 울 일이 전혀 아닌 것에 눈물을 자주 보였고 낯선 것을 시작하는 것, 즉 피아노나 수영 등을 배우는 것에도 너무나 망설임이 많았다.

 



둘째는 마른 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곤 잘 먹지 않았다.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며 바로 숟가락을 놓고,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도 더 먹으려 하지 않았다. 먹은 만큼도 제대로 살로 가지 않는지, 항상 마른 편이었고 보약으로 보충해보려 한의원에 갔지만 “이 아이는 살찌기 가장 어려운 체질이네요”라는 말만 허무하게 들었을 뿐이다.


그런 둘째의 성격은 의외로 꽤 단순하다. 별 고민이 없다. 대화를 하다가 언니가

“~게 되면 어떻게 해.”

라며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러면 다르게 하면 되지.”

라며 해결책을 내놓았다.

걱정도 별로 없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도 즐겼다. 동생이 피아노, 수영을 시작할 즈음 큰 아이도 함께 시작했다. 다른 집은 동생이 언니나 형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한다던데 우리 집은 반대였다. 동생이 없었다면 큰 아이의 새로운 시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둘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마음에 간담이 서늘할 정도다.




극과 극 식성, 극과 극 몸매, 극과 극 성격의 두 아이를 키우며 때로 엄마인 나부터 성격보다는 보이는 모습으로 아이를 대하는 일이 많다.


큰 아이는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나보다도 키가 컸는데, 그러다 보니 ‘저렇게 덩치 큰 아이가 왜 이것도 못할까’ ‘커다란 아이가 애기 짓 하는 것 좀 봐’라고 여길 때가 있다. 10년 넘게 키우며 아이의 예민한 성격을 많이 경험했으면서도 문득문득 ‘왜 그렇게 안 하려 하는 것이 많으냐’고, ‘뭐가 그렇게 속상하냐’고, ‘왜 그렇게 우냐’고 타박하는 경우도 많다. 겉모습만으로는 털털하고 성격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런 모습에 더 화가 나고 답답한 것 같다. 자기가 원해서 13살에 어른 같은 몸이 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어른 취급을 받는 아이는 얼마나 억울할까?

반면 두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둘째는 제 나이보다도 작고 어려 보여 조금만 표정이 안 좋아도 달래주고 위로해주게 된다. ‘안 그래야지’하면서도 엄마인 나도 아이의 겉모습을 보며 대우를 달리하니 남들은 오죽할까, 싶다.


언젠가 아이 친구 엄마들과 대화를 하다가 우리 집 두 아이에 대한 성격 판단을 하는 것을 보고 이런 편견이 의외로 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엄마들도 나처럼 큰 아이가 털털하고 성격이 좋아 친구도 많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둘째는 작고 귀엽지만 더 잘 울고 소심할 것 같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뻔한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상대의 보이는 모습에 그의 성격까지도 판단해버리는 이 사회의 오래된 습관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나 또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지나치게 비만인 사람은 그저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고 성격 또한 무난하고 걱정이 없이 털털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한 기사에서는 어느 정도 과체중인 사람이 더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다는 연구 결과를 보기도 했다. 물론 성인의 활동과 몸은 비례한다. 혼자서 운동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사람을 자주 만나고 음식을 같이 먹는 사람이 살이 더 찔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를 관찰하고 또 그 눈을 통해 다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기본적인 체질과 식성이 어른이 된 이후까지의 몸매를 좌우하고, 오히려 예민하고 소심하여 활발한 활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어려운 사람이 비만이 생길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현재 한 사람의 몸매가 어떻든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예민함, 둔함, 털털함, 소심함 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몸매를 형성하는 요인은 선천적인 체질을 비롯, 너무도 다양하며 오히려 몸매와 성격의 상관관계를 규정지으려는 시도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아이들의 체질과 식성은 계속 지속될 것이다. 중고등 학교에 진학해서 생활 패턴이 달라져 변화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본 체질은 이어질 것 같다(나의 인생을 놓고 보면).


큰 아이는 너무 과식하지 않도록, 둘째는 좀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도록 지켜보며 이런 세상의 편견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서거나 잘 극복하며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그 아이들 또한 보이는 것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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