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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야바야바 Sep 02. 2016

<그을린 사랑> 자기 구원의 서사시

'일 더하기 일은 일'이라는 비합리적 명제도 납득하게 만드는 힘



신은 죽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다. 바다의 요정 테티스는 자신의 갓난아기를 스틱스라는 강에 담갔다. 스틱스는 우리 전설 속 황천(黃泉)과 같은 저승의 강. 그곳에 담겼다 나온 사람은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져 창칼의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강한 아이를 만들겠다는 모성의 발로였겠지만, 강에 담글 때 붙잡았던 발목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장성한 아이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해 그리스의 장군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지만, 트로이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가 쏜 활에 발목을 맞아 쓰러지고 만다. 그 유명한 아킬레스의 죽음이다.


 신은 죽었다. 아니, 사실 신은 죽어서도 어디에든 존재한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만의 신을 등에 업은 채 그들의 신전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기 신전이 타인에 의해 침범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각자의 신을 지키고자 신자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상대방의 신을 공격해야 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에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났다. 개인 간의 다툼으로, 집단 간의 전쟁으로, 암살 기도로, 제노사이드로, 광인의 테러로, 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상대방의 신을 죽여야 나의 신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다.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에 나오는 서사적 배경은 신화적 세계이다. 서로 다른 신을 떠받드는 두 세력이 명분을 걸고 싸우고 있다. 내전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한다. 하지만 신의 이름 하에 인명의 살상은 용인되는 세계. 그래서 거대한 서사에 휩쓸린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마치 신화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인 니하드의 발목에 난 문신이 이 영화의 '특이점'이 되는 것 또한 이를 생각한 한 감독의 의도였으리라.



순수 수학의 세계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수학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찾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모험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주제를 다룰 것이며 그건 항상 또 다른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될 것입니다.

                                                 (...) 순수 수학, 고독의 땅에 잘 왔습니다.”


 <그을린 사랑> 초반부에 나오는 이 대사는 ‘상식의 전횡’을 암시한다. 순수 수학의 세계는 상식이나 진리, 정답이 없다. 문제에 대한 정답은 새로운 문제를 낳을 뿐이다. 우리가 상식, 진리라 믿고 있는 것들이 순수 수학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순수 수학을 연구하는 과정은 ‘고독함’ 그 자체이다.


 주인공 ‘나왈’의 삶은 순수 수학과 닮아있다. 그녀는 갈등의 세계에 휩쓸린 피해자다. 종교 문제로 미망인이 되었고, 사회 갈등 속에서 가족을 잃은 채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정치 세력에 붙잡혀 투옥된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감옥에서 나왈은 ‘노래하는 여인’이 되어 집단이 강요하는 ‘신’을 부정한 채 스스로 고독의 세계로 들어간다. 15년의 지독한 수형 생활을 감내한 끝에 자식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고독한 이방인이 되어 캐나다에 당도한다.


 영화 속 순수 수학은 왜 이야기되었을까? 반전을 위한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순수 수학의 세계는 신의 세계와는 대칭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명분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신의 세계. 마치 물과 기름, N극과 S극처럼 섞이려야 섞일 수 없는 극단의 대립을 막을 수 있는 건 '일 더하기 일은 일'과 같은 비상식이다. 하루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오늘날의 내전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건 명분이 아닌 '무언가'이다. 순수 수학의 세계는 그 '무언가'를 말할 것이다.



자기 구원의 이야기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실’은 사태의 발생이고 인간의 삶에 피상적인 정보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러나 개별 사태를 엮고 핵심을 관통하는 ‘진실’은 우리 사고에 통찰력을 부여한다. 사실을 감춘 채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나왈은 삶의 막바지에서야 진실을 마주한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감내하며 얻어낸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자기 아들과 자기 자식의 아버지가 동일인물이라는 것? 그 또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 영화를 단순히 반전영화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화면이 과거와 현재, 어머니인 나왈과 딸인 잔느를 반복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또 나왈의 서사가 자신의 딸인 잔느에게 이르는 역사임을 의미한다. 폭력으로 인해 자신과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고통의 끈을 끊어내기 위해, 죽음에 직면한 나왈은 결국 자신을 강간한 아들을 용서하는 쪽을 택한다.


 무덤에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아마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묻혔을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증오는 증오 외에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진실은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메시지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신전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고착화된 타성이다. 역사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영화는 그 어떤 증오도 극복할 수 있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답을 던진다. 비상식을 상식으로 극복하는 자기 구원의 서사시. 일 더하기 일은 일이라는 비합리적 명제마저도 납득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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