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리만치 무모한 자신감이 솟구치는 순간이 있다. 방비엥에서는 뛰지 못할 것 알면서 거침없이 다이빙 포인트에 올라섰고, 수영 할 줄 모르면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겠다고 태국의 어느 바다에 도착했을 때도 까짓! 할 수 있겠지! 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겨울 산행에서 아이젠이 필수인 걸 알면서도 한라산을 동네 뒷산 정도로 여기고 가볍게 패스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분위기를 살리는 요리를 만들어보겠다고 떵떵 거린 적도 있다. 무모한 자신감이 지나간 순간들은 처참함을 남기기 일쑤였다. 방비엥에서는 높은 나무 위에서 오들오들 떨며 뛰지 못한 채 다이빙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남겼고, 겨울 한라산에서 삐긋거리는 발걸음에 등산로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음식으로 친구들이 입맛이 아닌 웃음 코드를 저격해버렸다. 이쯤 되었으면 무모함이 솟구칠 때 한 번쯤 생각이라는 걸 해볼 만도 한데 여전히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리는 걸 보면 지미봉에서의 수난은 당연한 결과였다.
파란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가로지르는 날, 눈에 가득 담길 시원한 풍경을 찾기 위해 지미봉으로 향했다. 지미봉 오름의 높이는 164m. 숫자를 보고는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무모한 자신만만이 올라왔다. 이 정도쯤이야, 뛰어서도 오르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천천히 오르자고 이야기하는 우남씨(=우리집에사는남자)에게 거드름의 미소를 날리며, “뭐 얼마나 힘들겠어! 알아서 할게”라고 이야기하며 스피드를 올렸다. 딱 거기까지였다. 거드름 미소가 얼굴에 남아있는 시간은 빠른 발걸음과 함께 사라졌다.
조금 과장해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경사가 가파른 탐방로는 몇 번의 발걸음에 항복을 외치게 만들었다. 풍경을 본다는 핑계로 자꾸만 멈추었다. 깔딱거리는 숨소리를 진정시키며 보이는 풍경은 정상에서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멈추고 싶다는 종아리의 외침은 무시한 채 방금 보았던 풍경을 무기 삼아 한 계단 한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164m의 높이, 숨을 깔딱거리며 오르는 시간은 15분.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탐방로의 경사로 인해 오르는 내내 몸의 반응은 꽤나 격렬했다. 몇 번의 멈춤과 몇 번의 들숨 날숨을 반복하고 나서야 지미봉 정상에 도착했다.
“땅의 끝”이라는 이름처럼 제주도 동쪽 끝자락 성산읍 종달리에 위치한 지미봉은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꽤나 색다른 매력을 뽐내는 오름이다. 일반적으로 제주도 중산간에 오름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지미봉은 해안 도로와 근접한 곳에 있다. 덕분에 일반적인 오름과는 다르게 파란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성산읍 일대의 마을이 아기자기한 장난감 건물들처럼 보여 걸리버가 소인국에 닿았을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바다 풍경만이 전부는 아니다. 정상에서 보이는 동쪽 방향 중산간 오름들의 모습은 파란 바다와는 다른 결로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탐방로는 입구가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보통은 주차장이 마련된 1번 탐방로를 이용한다.
겨우내 정신을 붙자고 다다른 정상에서 숨을 고르기도 전에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득한 시야 너머 펼쳐진 제주 바다에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위풍당당 보였고, 반대쪽으로 보이는 동쪽 오름들은 햇살을 가득 머금은 채로 빛나고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한참의 시선이 머물렀다. 두 눈에 담아내기에 넘쳐나는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누가 보아도, 언제 보아도 압도당할 풍경이었다. 천천히 오른다고 하여 이 풍경이 도망가는것도 아니였는데, 사부작 사부작 주위를 둘러보며 올랐어도 충분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날 지미봉을 마주하게 된다면 무모한 자신감은 내려놓고, 한걸음 할걸음에 풍경을 눈에 담아보자 마음먹었지만, 한번 올랐으니 괜찮다는 또 다른 무모함에 숨을 깔딱거린건 안 비밀이다.
지미봉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산3-1
주의 : 탐방로 경사가 심하다.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천천히 오르는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