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다혜리포터입니다!”
한글을 뗀 후부터 책을 읽는 게 좋았다. 책 속에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세상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었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 그 활자들을 읽어 나가면 눈앞에 오색 빛깔 선명한 그림이 펼쳐졌는데 생생함 때문에 눈앞이 일렁여 멀미가 나는 듯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하고 있던 인턴 생활이 맞지 않아 고민하던 중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다. 어느 리포터가 <6시 내고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어선을 타고 선원들과 함께 그물을 끌어 당기며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고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 일이 하고 싶었다. 내 몸으로 직접 부딪혀 경험하며 ‘살아 숨 쉬는 책을 읽는 일’.
화면에 잘 나오게 예쁘지도 않고, 방송을 할 만큼 끼가 있지도 않고, 동영상은커녕 사진 찍기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리포터를 하겠다니 엄마를 비롯한 주변 모두가 어리둥절. 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한 번뿐인 인생 못 먹어도 go’가 인생의 모토인 나.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 도우사… 기적적으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고 싶어서 칼을 빼들긴 했으나 나 자신조차도 문만 두드리다 끝나게 될 줄 알았던 도전이었다. 방송인을 양성하는 에이전시에 들어가서 지방 방송국 면접을 보고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그렇게 차근차근 경력이 이어져 운 좋게도 최종 목표였던 <6시 내고향>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6시 내고향> 리포터로 11년간 전국을 누볐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논으로 밭으로 바다로 산으로 촬영을 다니기 전까지 도시라는 우물 속 개구리였다. 일하며 만난 드넓은 세상을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이런 세상도 있구나.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행복할까’ 고민했다. 다양한 삶의 모양을 보면서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모두 옳다. 틀린 것은 없다. 나만의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답을 찾은 것 같았다. 봄의 냉이 달래, 여름 왕나무 그늘 아래의 시원함, 가을 도랑에 젖어 있는 낙엽냄새, 겨울 논에 가득한 기러기. 이것들에 가까이 사는 것이 그 답이었다. 나는 시티뷰보다 논뷰가, 쇼핑보다는 텃밭을 일구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때 결심했다. 시골에 가서 집을 짓고 살겠다고. 가능한 한 빨리. 물론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지펴진 불씨를.
일단은 그에게도 텃밭을 일구는 재미와 기쁨을 알려줘야 했다. 그래서 데이트는 주말농장에서 했다. 친구들이 예쁜 카페에 가고 영화관에 갈 때 우리는 일명 몸빼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고 농장에 갔다. 호미를 들고 손목이 시큰대도록 밭을 맸다. 나의 남자친구라는 죄로 그는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고 멋진 식당에 가서 훌륭한 식사를 하는 대신 뙤약볕에서 등허리가 땀으로 젖을 때까지 일하다가 안 그래도 까만 얼굴이 더 타들어 가는 데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밭에 가면 상추랑 깻잎이 쑥쑥 자라 있었다.
“오빠, 농사 엄청 잘 짓는다~!! 재능 있다!!!”
원래 좋아하는 텃밭 농사인데 그와 함께 하니 더 행복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얘는 이게 왜 좋을까?’아리송한 표정으로 함께 하던 그도 직접 땀 흘려 키운 작물 맛을 보더니 점점 농사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좋았어... 계획대로 돼가는군...!’
결혼을 했다. 가난한 신혼부부였던 우리. 하지만 나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다.
‘시골에 땅을 사서 집을 짓겠어!’
에어컨 살 돈을 아껴 저축했다. 새 선풍기 살 돈을 아껴 저축했다. 대신 둘이 들어갈 수 있는 크고 빨간 고무 다라이를 하나 샀다.
신랑이 자취할 때 쓰던 꼬질꼬질한 구형 선풍기를 틀고 자다가 더우면 빨간 다라이에 찬물을 받아놓고 들어가 더운 몸을 식혔다. 바짝 독기가 올라 있는 여름은 불을 안 붙여도 초가 녹아내릴 것 같을 정도로 더웠다. 하지만 빨간 대야와 달달거리는 선풍기로 그 여름을 버텼다. 그래도 우리에겐 꿈이 있으니까 괜찮았다. 수돗물이 계곡물 같았다.
겨울에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구스다운을 입고 있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면 입김이 나올 때도 있었다. 추워도 춥지 않았다. 우리에겐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땅을 살 수 있었다. 드디어 집을 지을 준비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