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활용은 AX가 아니다
AI와 함께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금, 사무실의 공기는 묘한 긴장과 피로가 공존한다.
회의록 요약부터 데이터 시각화까지, 과거에는 며칠이 걸리던 작업들이 이제 단 몇 초면 눈앞에 펼쳐진다. 기술적 지표만 본다면 우리는 이미 전례 없는 가시적 성과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개별 도구의 속도는 빨라졌는데, 조직 전체의 성과 지표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미래의 엔진을 장착하고도 늪에 빠진 것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이유는 도구의 성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도구를 담아내는 조직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2025년 9월, 스탠퍼드 대학교 소셜미디어 연구소와 베터업 랩스(BetterUp Labs)가 미국 사무직 근로자 1,1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이러한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응답자의 40%가 지난 한 달 안에 동료로부터 AI가 만들어낸 저품질 산출물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매끄럽고 정돈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맥락이 빠져 있거나 핵심이 없는 결과물, 즉 깔끔한 서식 안에 담긴 공허함이다. AI가 양산하는 저질 콘텐츠인 'AI 슬롭(slop)'에 빗대어,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이 현상을 '워크슬롭(workslop)'이라 부른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 워크슬롭을 받은 사람에게 전가되는 기회비용이었다. 빠진 맥락을 채우고, 사실 관계를 검증하고, 원래 의도를 확인하는 데 건당 평균 약 2시간이 소요됐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워크슬롭을 받았을 때 짜증을 느꼈고, 42%는 보낸 사람에 대한 신뢰가 하락했다고 답했다. 단순한 시간 낭비를 넘어 팀 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까지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1만 명 규모의 기업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120억 원의 생산성 손실에 해당한다. 도구는 빨라졌지만, 조직은 무거워진 셈이다.
이 역설의 원인은 도구가 아니라 구조에 있다. 지식 노동자의 업무를 들여다보면, 실제 의사결정이나 가치 창출에 쓰이는 시간은 전체의 20~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80%는 그 의사결정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자료를 모으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보고서 초안을 쓰고, 상사의 검토를 기다리는 중간 단계. 이 구조는 정보가 부족하고 인력이 유일한 자원이던 시절의 유물이다. AI가 이 중간 단계의 속도를 높여주었을지는 몰라도, '중간 단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구조적 관성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워크슬롭을 검증해야 하는 새로운 절차까지 추가되면서, 효율을 위해 도입한 도구가 비효율을 늘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자연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북극여우는 겨울이 오면 흰 털로, 여름이면 갈색 털로 바꾼다.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지만, 네 발로 땅을 달리는 포식자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털색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우는 여우일 뿐이다.
벌새는 다른 길을 택했다. 꽃 속의 꿀에 도달하기 위해 공중에 멈추고, 심지어 뒤로 날 수 있는 유일한 새가 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360도 회전하는 어깨 관절과 분당 1,200회 뛰는 심장을 갖추도록 신체 구조 자체를 재설계했기 때문이다. 생존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지금 대부분의 기업이 하고 있는 일은 '조직적 털갈이'에 가깝다. 조직도와 결재 라인, 부서 간 칸막이라는 골격은 그대로 둔 채 AI라는 최신 도구를 덧씌운다. AX(AI 전환)를 외치지만 실상은 기존 공정에 AI를 끼워 넣는 것에 그친다. 10단계 공정을 8단계로 줄이는 것은 개선이지 전환이 아니다. 그 8단계 위에 워크슬롭의 검증 절차가 얹어지면 결국 생산성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재설계는 AI를 중심에 두고 조직의 골격을 다시 그리는 것이다. 10단계를 8단계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0단계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털갈이와 재설계의 차이는 조직이 던지는 질문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털갈이 조직은 '어떻게'를 묻는다. "이 보고서를 AI로 어떻게 빨리 쓸까?" "회의록 요약을 어떻게 자동화할까?" 이들은 기존 단계를 상수로 두고 AI를 변수로 쓴다. 각 단계의 물리적 속도를 높이는 것이 목표일 뿐이다.
재설계 조직은 '왜'를 묻는다. "AI가 실시간 데이터를 처리한다면, 이 보고 절차 자체가 왜 필요한가?" 이들은 최종 결과를 상수로 두고 기존 절차를 변수로 삼는다. 과거에는 3~4명이 한 달간 시장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서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했다. 조사 자체에 2주, 보고서 작성에 1주, 검토와 수정에 1주. 이 한 달의 대부분은 의사결정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재설계된 조직에서는 AI 에이전트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최적의 안 여러 개를 정리해서 가져온다. 인간은 조사자가 아니라 선택자가 된다. 준비에 한 달이 걸리던 의사결정이 하루면 끝난다. 중간 단계의 속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중간 단계 자체가 불필요해진 것이다.
2022년, MIT 학생 네 명이 AI 코딩 도구 '커서(Cursor)'를 만드는 회사 애니스피어(Anysphere)를 창업했다. 3년 뒤인 2025년 11월, 이 회사는 150명의 핵심 인력으로 기업 가치 40조 원을 달성했다.
이 회사가 보여준 것은 AI의 성능이 아니다. 골격의 재설계다. 이들은 기획-개발-검증으로 이어진 전통적 소프트웨어 기업의 분업 구조를 따르지 않았다. 소수의 인원이 AI 에이전트와 결합하여 제품의 설계부터 배포까지 전 과정을 직접 조율한다. 한 사람이 아이디어 도출부터 구현, 배포, 사용자 피드백 반영까지 전체 생애주기를 총괄한다. 정기 회의 대신 AI 대시보드로 상황을 실시간 공유하고, AI가 코드를 자동으로 리뷰하며 사람 사이의 소통 지연과 충돌을 원천적으로 줄였다. 대기업에서는 부서 간 조율에만 몇 주가 걸리는 변경이 이 구조에서는 즉각 가능하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AI 덕분에 소수가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AI를 제대로 쓸 수 있었다. 부서가 없으니 칸막이가 없고, 승인 라인이 없으니 지연이 없다. 무엇보다 맥락을 완벽히 공유한 소수는 AI가 내뱉는 불완전한 산출물(워크슬롭)을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즉각적인 판단자가 되어 그 자리에서 맥락을 입히고 과정 전체를 실시간으로 재설계한다. 워크슬롭의 비효율이 조직으로 전이될 틈이 없는 것이다.
같은 AI를 수백 명 규모의 조직에 도입해도, 각 부서가 자기 일을 더 빨리 하는 것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개발팀은 개발 속도를 높이고, 기획팀은 기획 속도를 높이고, 품질팀은 검증 속도를 높이지만, 세 팀 사이의 조율에 걸리는 시간은 그대로다. 승인 라인 다섯 단계를 거치는 시간도 그대로다. 부서 간 장벽은 AI가 아니라 골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890년대 공장에 전기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도 생산성은 정체되어 있었다. 공장주들은 증기기관 시대의 중앙 집중식 벨트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엔진만 전기 모터로 바꿨기 때문이다. 전기의 진정한 강점은 각 기계에 독립적인 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었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 공장 레이아웃을 뜯어고치는 것은 너무 큰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산성은 20년 동안 제자리였다. 진짜 변화는 기계마다 개별 모터를 달고 공장의 작업 흐름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을 때 일어났다. 엔진이 아니라 공장의 골격을 바꾼 시점이었다.
AI가 중간 단계를 가져가면, 인간에게 남는 본질적 영역은 판단이다. AI 에이전트가 제안한 선택지 중 조직의 맥락과 가치에 맞는 최선을 고르는 역할이다. 이제 중간 관리자는 서류 검토자가 아닌 현장 전략가로, 실무자는 데이터 입력자가 아닌 시스템 설계자로 거듭나야 한다. AI는 답을 제안할 수 있지만, 그 답이 가져올 파장이나 조직의 장기적 방향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이것은 거창한 혁신가로의 변신이 아니라, 준비 작업에 오랜 세월 묻혀 있던 본래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재설계의 과정에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AI가 중간 단계를 대체하고 조직의 골격이 바뀌기 시작하면, 구성원들은 업무 변화 이상의 존재론적 위협을 느낀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AI가 워크플로우에 깊숙이 개입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신뢰의 균열과 심리적 저항이다.
익숙한 반복 업무의 편안함이 사라지고 매 순간 판단과 책임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환경은, 자신의 전문성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불안을 안겨준다. 많은 조직이 AX를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기술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도구가 껍데기를 벗겨낸 뒤에 드러나는 역할의 민낯과 거버넌스의 재배치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AX의 성패는 최신 알고리즘의 도입이 아닌, 비즈니스 모델의 재창조와 거버넌스의 재설계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조직은 먼저 AI 도입으로 인한 불안이 변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지 않도록, 실패를 학습의 과정으로 수용하는 문화를 구조적으로 내재화해야 한다. 단순히 도전하라는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한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자산이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AI가 혁신의 방식 자체를 재구성함에 따라, 구성원들이 기존의 관성을 깨고 새로운 업무 흐름을 실험할 수 있도록 권한 체계를 과감히 재편해야 한다. 정보에 기반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할 때, 비로소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재설계가 일어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AI는 최적의 답을 제안할 수 있지만, 그 답이 지향해야 할 조직의 가치와 장기적 방향에 대한 최종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 구성원의 역할 또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중간 관리자는 더 이상 부하 직원의 결과물을 검수하는 '서류 검토자'가 아닌, AI의 통찰을 비즈니스 기회로 연결하는 전략가가 되어야 한다. 실무자 역시 주어진 데이터를 입력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AI와 협업하는 업무 프로세스 자체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설계자로 거듭나야 한다.
"AI가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 조직을 처음부터 만든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때 비로소 재설계는 시작된다. 털갈이를 하는 여우로 남을 것인가, 골격 자체를 바꾸는 벌새가 될 것인가. AX에 대한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돌파할 유일한 길은 조직의 골격을 다시 그리는 결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