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업그레이드의 비극 : 갑자기 가성비 팀장이 되다.

비정규 시즌에 승진한 사유

by 근노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2주 동안 연재를 중단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챈 거 같아. 이럴 땐 비주류임에 감사하다.

(누군가로부터의 독촉이나 컴플레인이 없으니, 내 마음 역시 전혀 초조하지 않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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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상당히 바빴다.


아이 방학을 맞아 가족여행이 있었고,

그를 위한 준비로 여행 계획 세우기보다는 여행 기간 중 예상되는 업무의 사전 보고로 야근이 잦았다.

그런데 웬걸.

다녀오고 나서는 더 늦은 시각까지 야근 랠리였다.


하여 오늘은 제가 이리 바빠지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보직 발령] OO실 근노보 OO팀장 2025.11.01.


나는 정규 시즌에 등판한 투수가 아니다.


전임 팀장의 갑작스러운 이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가 얼레벌레 승진을 했다.

아니다. 일부 정정한다.

'땜빵' 승진을 해'버렸'다.


내 딴엔 좀 일방적인 발령이라, 축하 인사 답례도 떨떠름하게 답했다.

실상은 비공식적 고사 의사를 밝힌 터였다.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겸손함 같은 사유가 아니다.

지극히 경제적 판단이었다.

아이를 맡길 곳 없는 맞벌이 처지인 나에게 필요한 건,

'팀장'이라는 직책보다 아이의 알림장을 함께 봐줄 '시간적 여유'다.


게다가 나란 인간은, 뼛속까지 '경제적 인간'이다.

연봉 인상과 함께 들어온 팀장 승진 제의였다면?!

돌봄 선생님을 붙여서라도 어떻게든 조율하려 들었겠지.

사명감이나 리더십에 대한 로망이 아니라, 합리적 보상에 따른 적합한 움직임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업그레이드는 '무료'였다.

팀장을 맡았으나 연봉은 동결이었고, 직책수당 월 15만 원이 추가된 정도다.

반면 월 15만 원과 맞바꿔 나에게 요구된 것은

기존 업무에 더해 일장연설의 각종 회의 참석과 업무 보고였다.


전임 팀장님 영입 당시,

연봉 수준을 맞추기 위해 이례적으로 임원급에 준하는 처우로 고이고이 모셔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분의 공석에 나 같은 일개 직원 나부랭이를 팀장으로 앉히다니.


하긴, 따지고 보면 회사 입장에선 이보다 훌륭한 '가성비' 선택지는 없었겠다.

영입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 리스크를 줄이면서,

이미 조직 생리를 잘 아는 내부 인력을 추가 비용 없이 활용하는 것.

나는 그저 회사의 '경제적 세이브'가 만들어낸 최적의 결과물이구나 생각하니 더없이 회사의 결정이 얄밉고 배 아프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러한 속사정을 어디에도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속도 모른 채 인사발령에 대한 축하 인사가 이어지고,
피상적인 인사가 반복되던 중.

가까운 지인의 축하에 그제서야 팀장직이 싫다고 말해 보았다.
그마저도 연봉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한 채로.


그런데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나에게 조심스러운 충고를 건넸다.


누군가는 팀장 승진 심사를 몇 년씩 떨어지기도 해.
그러니 팀장직이 싫다는 말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어. 조심해.


......

맞네. 그럴 수도 있겠네.

보직을 달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운 좋게 자리를 꿰찬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


억울함을 호소할수록 내 처지는 더 구차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택했고, 회사에서 '자발적 내향인'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 나는 팀장이 좋다 싫다 같은 사담을 일절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회식이나 커피 타임처럼 말이 샐 수 있는 자리는 가급적, 티 안 나게, 효율적으로 피하고 있다.


겸손해서도, 의욕 없이 보여서도 아니된다.

'말'이 '오역'으로 변질되는 조직의 야만을 익히 보아왔기에, 가능한 한 덜 노출되는 쪽이 가장 안전한 방어기제라고 판단했다.



이번 일은 내게 분명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회사는 개인의 삶의 타이밍보다 시스템의 효율을 먼저 본다.

그것은 악의가 아니라 거대 조직의 생존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값이 싸게 쓰이고 있다는 이 서글픈 감각을 '성장'이나 '기회'라는 예쁜 포장지로 미화하지 않겠다.


미화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만이, 정규 시즌이 아닌 승진자에게 허락된 마지막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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