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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상을 두 번 받는 방법?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

by Atterrissage



프랑스 문학상 중 최고로 평가되는 공쿠르상을 아시나요?

글을 쓰는 분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는 저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간략히 이 상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공쿠르상 상금 10유로 수표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에드몽 드 공꾸흐/에 의해 만들어진 이 문학상은 1903년에 첫 수상이 시작됐고, 매년 11월 초에 (국적은 상관없고) 프랑스어로 쓰인 그해에 나온 장편 소설책 중 단 한 권만 선정해 수여하는 굉장히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입니다. 현재는 상징적으로 10유로의 상금만을 주지만 당선이 되면 수십만 부의 판매와 수십 국의 해외번역이 이뤄지기 때문에 작가에겐 영광뿐만 아니라 굉장한 금전적 이익도 가져다주는 상입니다. 웅장한 장소에서 수상작을 발표할 것 같지만, 1914년부터 에드몽 드 공쿠르가 생전에 자주 방문하던 파리의 Drouant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당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좌)1973년 Drouant 레스토랑 외관 / (우)식당 내에서 공쿠르상을 발표하는 모습



공쿠르 형제 그림



에드몽 드 공쿠르는 프랑스 작가였으며, 그에게는 쥘 드 공쿠르라는 형제(동생)가 있었습니다. 동생도 역시 작가로 활동했으며 미혼으로 40세에 요절했고, 에드몽 드 공쿠르 역시 평생 미혼으로 살다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에드몽 드 공쿠르는 유언에서 '우리 형제를 기념할 문학상'을 만들어달라고 하였고, 그들에게는 이 상이 자손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공쿠르상은 노벨 문학상처럼 모든 작가들을 통틀어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수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생에 한 번뿐인 영광을 두 번이나 누린 프랑스 작가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그 주인공은 바로 오늘 글의 주인공인 '로맹 가리'(Romain Gary)/호망 갸히/입니다.









로맹 가리 사진


로맹 가리는 1914년 5월 21일 러시아 제국(현재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로만 카체프(Roman Kacew)였고(후에 로맹 가리로 개명), 14살이던 1928년에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니스로 이주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성공한 위대한 인물(군인, 예술가, 지식인 등)로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들은 프랑스에 터를 잡고 국적을 취득하게 됩니다. 로맹가리는 파리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이후 2차 대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 전쟁공로로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포함한 여러 훈장들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이후, 로맹 가리는 외교관(6개 국어 이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으로 근무했고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는 영화감독각본가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생애를 짧게 살펴만 봐도 정말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전투기 조종사, 국가 공로 훈장, 외교관, 6개 국어, 공쿠르상 수상 작가(그것도 두 번), 영화감독, 각본가' 중에 한 가지라도 이룬 사람이 흔할까요? 사실 영화에서도 캐릭터를 이렇게 설정하면 밸런스가 붕괴됐다고 한 소리 들을 게 뻔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설명은 영화의 장르를 바꿔버릴 정도로 더 극적이고 놀랍습니다.


로맹 가리는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공쿠르상을 수상했고,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이라는 작품으로 또 공쿠르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의 수상자 이름은 로맹 가리가 아닌 '에밀 아자르'(Émile Ajar)였습니다. 그가 필명을 사용해 정체를 숨긴 채 활동했기 때문이죠. 그는 처음엔 편지를 통해 공쿠르상 수상을 거부하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 Hervé Bazin은 '자신들은 후보자가 아닌 책을 위해 투표하며, 공쿠르상은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마치 태어남과 죽음처럼 말이죠.'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 그의 거부를 거절하게 됩니다. 수상 이후 로맹 가리는 계속해서 언론에 정체를 숨겼지만, 후에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의 조카 폴 파블로비치(Paul Pavlowitch)를 대신 에밀 아자르로 내세워 활동하게 했습니다. 폴 파블로비치가 로맹가리를 대신해 언론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거죠.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이미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이전에 다른 책을 출판한 적이 있기도 하고, 당시에 공쿠르상 수상자의 정확한 신분 확인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겁니다.


폴 파블로비치의 방송 출연 사진



언론은 시간이 지나 폴 파블로비치가 로맹 가리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폴 파블로비치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과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문체와 주제의 유사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에밀 아자르가 로맹가리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로맹 가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로맹 가리가 계속해서 거짓을 고수했기 때문이죠.



영화 l'enchanteur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관계를 의심하는 내용의 <l'enchanteur>라는 프랑스 tv영화도 존재하니 흥미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일생이 영화라면 여기까지만 봐도 러닝타임이 길다고 불평이 쏟아질 텐데, 아직 극적인 내용이 더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화장실이 급해져 괴로운 상태로 작품을 보고 계시겠죠. 앞으로 나올 내용도 그처럼 마음 편하게 들을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진 세버그



혹시 로맹 가리가 결혼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바로 프랑스 영화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진 세버그'입니다. 둘은 1959년에 알게 됐고 1962년에 결혼 했지만, 1970년에 이혼했습니다. (두 명 다 이전에 결혼한 적이 있고, 사실 둘은 법적인 혼인 기록이 없는 사실혼 관계였다고 합니다) 1979년 8월 30일 진 세버그는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사실 진 세버그는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그녀의 행적에 불만을 품은 미국 FBI가 그녀의 죽음에 기인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추측만이 아닌 것이 그녀의 죽음 이후, 로맹 가리가 아들 디에고 가리(Alexandre Diego Gary)와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FBI의 공식 문서를 공개했고, 다른 증거들도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문서에는 그녀가 임신한 둘째 아이의 아버지가 흑인 당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지시와 FBI의 수년간의 감시 등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처럼 로맹가리는 결국 이혼을 선택했지만, 그녀가 죽기 전과 후까지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밀 아자르의 진실이 대중에게 밝혀진 것은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가 파리의 자택에서 입안에 권총을 쏴 자살한 이후입니다. 그의 사후 유작이자 유서형식의 글인 '에밀아자르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Émile Ajar)이 출판되면서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다고백이 공개됩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의 죽음은 진 세버그의 죽음과 관련이 없고 오랫동안 앓아왔던 우울증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많은 이들은 그녀의 죽음이 영향이 컸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아들 디에고 가리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힘들어하셨다고 밝히기도 했으니까요.




그의 마지막 책 Vie et mort d'Émile Ajar



'로맹 가리'라는 영화가 드디어 끝났는데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 지지가 않는군요. 암전 됐던 스크린에서는 그의 아들 디에고 가리가 아버지처럼 작가가 되었다고 하는 쿠키 영상이 나오고 있네요.


후에 아카데미 공쿠르 측은 에밀 아자르의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수상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프랑스가 로맹가리의 삶과 작품을 인정하고 존경한다는 뜻일 테니 이러한 결정도 이해가 갑니다.






결론적으로 공쿠르상을 두 번 받으려면 우선, 프랑스어로 장편 소설을 적어 심사를 통과해야 하고, 신분증명을 속일 수 있어야 하고, 혹시 들켰을 때를 대비해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국가 공로상을 받아야 하며, 외국어도 능통해 외교관이 되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아마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감명 깊게 봤던 영화 '새벽의 약속'을 추천하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로맹 가리의 동명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La Promesse de l'aube)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로맹 가리의 어린 시절부터 세계 2차 대전 그리고 그의 어머니 중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과하기도 하나 이는 또한 그가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그리고 더 나아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강한 원동력이 됐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주연배우로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Charlotte Gainsbourg와 Pierre Niney 가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연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좋았고, Pierre Niney가 나이가 들어가는 인물의 변화를 정말 잘 표현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도 그가 연기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훌륭한 배우임을 실감하게 한 작품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몇 년 전에 넷플릭스에서 감상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한국에서는 공개되지 않는 작품이라고 뜨네요. 저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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