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멘토
어릴 적 즐겨 읽었던 위인전. 어찌나 다들 하나같이 신기한 태몽과 상서로운 기운을 안고 태어났는지 옛날의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달랐나 보다.
위인전이 유치해지던 학창 시절엔 학습지 홍보 브로슈어에 딸려 나오던 명문 대학교 학생들의 합격 수기집도 재밌게 봤다. 그중 한 명하고는 편지까지 주고받았던 것도 기억난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만큼 진심이었다.
왜 그렇게나 좋았던 걸까?
무엇보다 스스로 정한 내 능력의 한계선을 끊임없이 확장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현재 나의 힘듦 정도는 한없이 가벼워져 무시할 만큼 작아지는 느낌도 좋았다.
책이 아닌 일상에서의 그 역할은 엄마 몫이었다. 내가 열몇 살 되던 해부터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엄마는 사회생활, 인간관계에 여자로서 필요한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이 멋지게 나오는 영화가 있으면 청불이라도 보게 했고 존경할 만한 어른과의 식사 자리에 굳이 날 데려가기도 했다.
한 번은 중학교 때였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과학 선생님이 시킨 일을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다음 날 혼날 생각에 두려워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니구먼.
솔직히 말하면 넘어갈 일이네.
엄마의 말 한마디에 집채만 하던 고민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엄마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다음 날도 무사히 넘어갔다.
하얀색 누비라 차 문을 열고 스커트 정장 차림으로 또각또각 교정을 걸어오던 엄마는 늘 언제 어디서나 자랑스러웠다. 트렌디한 헤어스타일에 네일과 페디까지 완벽했던 우리 엄마. 요즘도 엄마 옷장을 뒤지다 보면 홍콩으로 몰래 가져오고 싶은 옷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는 내 인생의 멘토다. 비록 속물 중의 속물이고 황금 자본주의에 절어 있으며 어쩔 땐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엄마의 말 한마디는 내게 천금과도 같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지금 내 나이 때 엄마는 뭐 했더라,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더라 떠올려 보곤 한다. 그럼 나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엄마도 그 나이에 그러하였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솟는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엄마는 나를 업고 강원도 전방 산골짜기에서 서울의 큰 병원까지 가서 수술을 시켰는데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엄마의 강단과 마주할 때면 난 우리 아이에겐 그런 엄마가 되어주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우리 딸 셋에게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친정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 그렇게 필요 없다는 데도 택배 보낼만한 걸 찾느라 쓸데없이 고생 중이다. 어제는 막내가 재미 삼아 보고 왔다는 신점 내용에 우울해하시는데 뻣뻣한 첫째 딸은 그냥 대답만 응, 응하고 말았다.
나와 동생들 태몽은 그렇게나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 주셨는데 정작 엄마 본인은 어떤 꿈을 꾸고 태어났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태몽 따위 없었던들 뭐 어떠랴. 그렇게 시집 잘 갔다는 엄친딸 이야길 눈치 없이 길게 하는 것도 뭐가 대수일까.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좋은 우리 엄마. 엄마 인생의 마흔둘, 마흔셋을 넘어 백이십 살까지. 내가 다 기억하리다.
@이백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