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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Apr 21. 2021

우리가 남자, 여자 화장실을 따로 만들기까지



제발 뚜껑 좀 닫으라고!



아... 그놈의 뚜껑이 또 열려있다. 치약은 물론이고 스킨, 로션도 한번 쓰고 나면 늘 오픈 상태. 누군가 닫아 놓지 않으면 평생 열려 있는 듯하다. 처음엔 돌려 닫는 마개라 닫기 어려워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주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을 푸고 나서 바로 뚜껑 덮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남편이 주방에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훤히 속살을 드러낸 냄비 옆으로 나뒹구는 뚜껑과 국자.


신혼 초엔 변기 뚜껑 여닫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딸 셋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변기 뚜껑은 항상 닫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매번 깔개까지 올라가 있던 변기.


점점 별거 아닌 거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하면 돌아오는 열 마디에 참아 보려 했지만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화장실 배변을 막 시작하던 때,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안방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는 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안방 화장실은 여자 화장실,
거실 화장실이 남자 화장실이야.



나만의 공간 독립 선언이었다. 우리 집에 여자래 봤자 나 혼자다. 남편도 나만큼 말 못 한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 고맙게도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뚜껑 열린 스킨,  이상  봐도 되니 좋았다. 이따금 너저분한 화장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탓이다. 깔끔왕 아빠가 봤으면  소리 하셨을 테지만 여긴 나밖에 없다. 얼른 청소하면 있는 일도 없던 일이 된다.


오늘도 열려 있는 뚜껑들


최소한 다른 누군가로 인해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는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두 평 남짓의 작은 공간, 화장실.


특히 홍콩 집 화장실은 집 보러 왔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동그란 욕조 위로 난, 커다란 통창 세 개. 그 기다란 직사각형의 통창엔 푸른 바다가 가득했다.


낮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햇빛에 부서지며 반짝이고 저 멀리 구룡반도의 건물들이 쏟아내는 무지개 빛 조명은 까만 밤바다에 수를 놓는다.


 다른 한쪽 벽면은 온통 거울이다. 작은 공간을  배는 넓어 보이게 했다. 종종 거울에 여과 없이 비치는 뒷모습에서 익숙하지 않은 마흔의 나잇살이 불쑥 튀어나올 때면 화들짝 놀랄 때도 있다.


그만큼 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게 되는 공간,

바로 여기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한다.

주로 샤워하거나 머리 말릴   때리면서.


나만의 공간, 화장실


정신없이 바쁜 아침에는 비누칠을 하며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정리해 보곤 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곤 혼자 중얼중얼 연습도 해 본다.


저녁에는 머리를 감다가 엉켜있는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보기도 한다. 이불 킥 백 번은 할 부끄러운 순간이 떠오르면 샤워기 흐르는 물속에서 작게 비명도 질러본다.


제아무리 천생연분, 환상의 콤비, 눈빛만 봐도 통하는 커플일지라도 매일의 일상과 공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사용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부모, 자매간에도 어려웠다. 그러니 삼십 년이나 다르게 살아온 남자와 여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뚜껑 열어 놓는 것도 따지고 보면 뭐가 대수일까.


언제라도 다시 닫으면 아무 일도 아닐  있다.  오히려 화장실 오래 쓰고 머리 감을 때마다 배수구에 머리카락 남기고 나오는 내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누가 맞고 틀렸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넘기면 아무것도 아닌데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고 상대는 그저 억울할 뿐이다. 당사자 둘의 문제이니 다른 사람의 조언, 객관적 잣대는 싸움만 붙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해결책은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말이 쉽지,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며 제 버릇은 개도 못 준다고 했다.


굳이 우리 엄마, 아빠랑 살았을 땐 아무 문제없던 습관을 힘들게 고치는 것보다 각자의 공간을 마련하고 존중하는 편이 내 경우엔 훨씬 쉬웠다.


범인은 바로 나!


아무리 가족이라도 다른 사람이 쓴 젖은 수건이 그대로 걸려 있을 땐 짜증이 밀려왔지만 내가 깜박하고 걸어 둔 젖은 수건엔 화가 나지 않았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드라이어를 보고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알고 보니  범인이 나였을  멋쩍게 웃고 넘어갔다.


이토록 자신에게는 관대한 나라니!



몇 년 전부터 남편도 남편만의 공간인 작은 방이 생겼다. 일상이 평화로워졌다. 아이 공부방만 꾸며줄 게 아니라 우리 둘 모두 각자의 공간이 필요했던 거다.


어제의 묵힌 감정  털어내 버리고 

사랑만 해도 짧을 인생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와인  잔과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갖다 놓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저 지금 그대로도 충분한,  


나만의 공간 화장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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