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에 대하여
아빠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배우가 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스무 살 초반 남짓의 나는 노원 사거리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 빨간 우체통을 앞에 두고, 두서없이 적어 내려간 두 세장의 편지를 손에 쥔 채 십여 분을 서성였다. 강남의 할리우드 연기학원도 한 달 다녔고, 한국 예술 종합원에서 연극사 교환 수업도 들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이 편지를 우체통에 밀어 넣을 수 용기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보내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고,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업으로 삼겠노라, 어렵지만 가보겠노라 제삼자에게 열심히 호소 한다한들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에게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에이 몰라' 읊조리며 눈을 질끈 감은 채 편지를 우체통에 밀어 넣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해졌다. 내 마음속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던 열망의 메시지가 분출되어 이제 곧 누군가는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였다. 그 이후는 그저 순간에 충실하여 맞닥뜨리면 되는 것이다.
해보지 않을 일을 할 용기는 초보 운전자가 익숙하지 않은 길을 택하는 용기에 비견된다. 반드시 이 새로운 길로 가야 하는 이유를 정당화하여 냅다 해보는 경험치 없는 자신감은 실로 우매하고 무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운전은 반드시 해봐야 늘지 않는가? 익숙하지 않을 길을 택하는 것이 그다지 옳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들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나라는 사람도 비교적 운전대를 쉽게 잡는 사람이었다. '배우가 되어볼까?' 생각하면 혼자 거울 보며 연기라도 해야 하고 연기 아카데미라도 다녀야 꿈을 '실현'하고 있다며 자위하는 부류에 속하기에 시작은 오히려 설렘과 흥분으로 대표된다.
며칠 뒤 편지를 받은 아빠의 코웃음과 함께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날아갔지만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두 달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혼자 가는 유럽 여행이 괜찮겠다며 주위에서 보낸 걱정 어린 시선도 개의치 않았다. 알고 싶고 보고 싶은 세상이 너무나 많았다. 유럽여행이 한 달 정도 되었을까 베니스에서 니스를 거쳐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한 파리는 내 세상을 뒤엎을 만큼 굉장했다. 무조건 이 나라에 다시 와서 이들의 언어로 공부하겠노라 룩셈부르크 공원과 소르본 대학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판테옹 계단에 앉아 다짐했다. 그러니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기쁨과 환희를 알리는 가슴속 팡파르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