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에 한해서 이렇게나 긴 장마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빗소리에 잠이 들고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잠깐이라도 해가 비치면 오늘은 맑으려나 하고 기대를 가져봅니다. 비 오는 것도 좋지만 사나흘이 지나자 어쩐지 기분도 먹구름같이 무거워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은 흙탕물로 변해 강변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 새하얀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나 강을 감싸는 모습은 평소에 볼 수 없던 진풍경이라 오래 눈길을 끌었습니다. 나눠져 흐르던 물줄기들은 하나로 합쳐졌고 강을 가득 메운 초록색 수풀도 모두 잠겼습니다.
햇빛을 쬐며 얕은 강 한가운데 서 있기를 좋아하던 하얀새는 센 물줄기에 중심을 잃고 자꾸만 뒤로 밀려납니다. 그래도 서식지에 생긴 큰 변화를 받아들이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빗속을 걷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평소와 다른 강의 모습을 더 자주 보러 갔습니다. 물이 불어나자 바로 옆에서 강이 흐르는 착각이 듭니다. 거대하고 느릿하게 흘러가는 물속으로 삼켜질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변화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뿐이었습니다.
변덕스러운 날은 비가 내렸다 해가 비치기도 했습니다. 비가 잠잠해진 틈에 며칠 거른 뒷산에 오르자 각시원추리가 어느새 노란색 꽃봉오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밝은 꽃봉오리 덕인지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면서 해가 떠오릅니다.
해가 떴어도 축축한 땅 위로 쉴 곳이 없었기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산 아래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 년 넘게 들어본 적 없는 숲의 물소리는 사막의 오아시스만큼 신기하게 느껴졌는데요. 내리막에 다다를수록 경쾌한 물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아쉽게도 풀과 나무로 가려져 흐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래 메말랐던 물길에 살아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해 뜨길 기다렸던 매미들이 울고 하늘에는 오랜만에 하얀 구름도 떴습니다.
우산에 가려졌던 시야가 트이자 눈앞으로 아주 예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내내 내리던 비에 젖은 들판과 숲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햇살을 받은 수면처럼 윤슬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치 눈앞에 햇살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촉촉한 빗물들이 따스하게만 보였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이파리들은 초록색 대신 유리알 같이 투명한 빛으로 보였고, 바람이 불자 몸을 맡기며 살랑대는 모습에선 한산한 분위기가 났습니다. 커다란 나무들은 바람에 재채기가 인 듯 물기를 털어냈고 유난히 팔랑거리며 춤을 추는 나뭇잎들은 꼭 낮별 같았습니다.
한 시간쯤은 가만히 서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사진에는 온전히 담을 수가 없었기에 눈에라도 오래 담고 싶었지만 이십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하늘은 어두워졌고 매미 울음소리와 하얀 구름은 사라졌습니다.
흐렸다 맑았다 다시 흐려지는 순간은 굉장히 빠르고 쉽게 진행이 됩니다. 어쩌면 그리 간단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네요. 짧게 해가 뜬 순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