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 회장 등이 축구판에서 나가야 하는 이유
2023년 3월 우루과이와의 평가전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022 월드컵 16강을 기념한다면서 '축구인의 대통합'이라는 의의를 앞세워 기습적으로 축구 관련 범죄자들 사면을 단행했다. 여기에는 승부조작 수십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팬들이 극도로 반발하자 협회는 부랴부랴 취소했다. 협회장은 올해 출간한 자서전에서 이를 두고 무려 마틴 루터킹의 말을 빌려서 회고한다.
용서할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할 힘도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초 아시안컵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았다면, 축구를 좀 더 보는 사람들은 2023년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클린스만, 누구나 단 5분만 인터넷에 검색해서 국가대표 감독 적격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3년이나 어느 팀 어느 나라에서도 부르지 않은 자질 없는 감독을 선임했다. (본인은 계속 부인하지만) 협회장이 단독으로, 선수시절 유명해서 이름값있다는 이유로. 그 결과는 다들 경험한 그대로다.
그 밖에 책임 회피를 위해 선수를 방패로 삼고(손흥민 이강인 사건), 감독 선임 과정 무능과 불공정, 국가대표 지원 행정 무능력 등 이해할 수 없는 행태들이 있었고, 이는 이번 10월 국정감사와 문체부 조사로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본인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협회장의 자서전 서술과 국정감사에서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박지성 선수 시절에 비해 요즘 우리나라 선수들이 워낙 잘해서 해외 유명클럽에서 많이 뛴다. 팬 입장에서는 즐겁게 축구를 보고 싶은데, 그들을 지원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협회가 엉망이니 답답해 미칠 수밖에.
그래서 처음에는 협회장이 그저 나쁘게만 보였다. 그가 하는 행동, 생각이 한국축구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안 좋은 일에서는 선수들을 방패로 삼으며 숨고, 경사가 있으면 누구보다 앞에 서며 그들의 공은 협회의 업적으로 슬쩍 가져갔다. 특히 국정감사에서 보인 태도에서 불공정하고 무능력한 것에 대해 전혀 잘못이나 시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급기야 팬들이나 국회의원까지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쩜 어느 하나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보니 화가 나는 것도 지칠 때쯤 궁금해졌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깨달았다. 물고 태어난 수저의 차이가 전부였다. 그것이 모든 괴리를 만들었다.
정체성에 따라 세상을 보는 렌즈, 객관적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 인지하는 모습도 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 평범한, 지방에서 올라와 자수성가하여 겨우 자가로 먹고사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남들과 같이 학교 졸업하고 경쟁하고 취업하여 먹고산다. 그는 누구인가? 대기업 회장의 자제로 태어나 내가 막 밥벌이 할 나이에 (HDC) 기업 총수가 된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공정'이라는 게 나와 다르고, 그가 내리는 결정의 무게와 힘도 달랐다. 나의 결정은 힘이 미약하고 수많은 저항에 부딪친다. 그래서 그 과정이 단련될 수밖에 없다. 기업 총수의 책임은 본디 막중하기에 결정의 힘이 큰 만큼 신중해야겠지만, 그는 고집이 있었고, 그저 그가 뜻하는 대로 모든 것이 굴러간 모양이다. 그가 뜻하는 바에는 법도 상식도 없었다. 밑에 있는 실무자들이 피를 토하며 굴렀을 것이고 그는 그걸 모른 채 결과만을 누렸을 것이다.
내 기준에서 생각하면, 일련의 행동들이 오직 본인 욕심만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심으로만 가능하다 봤기에 그들을 나쁘게 본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니 그렇지 않았다.
현안질의 때 박문성 해설 위원이 팬들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우리와 살아온 길이 다르니 보통 우리가 문제 삼는 불공정 등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바로 앞에 협회장 등을 두고도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아주 용기 있는 행도이었다. 그는 반평생 몸담은 축구계가 말도 안 되는 무능함에 회의를 느꼈다. 동시에 팬들과 선수들의 열정으로 순수하게 한국축구가 부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축구 관계자가 아닌 '열사'로 불리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기득권 세력과의 줄을 끊은 것이다.
이번에 축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인물이 두 명 더 있다. 한 사람은 박주호 위원, 전력강화위원이자, 이번 감독 선임 불투명에 대해 내부고발을 한 사람이다. 그는 협회 관계자로서 얻을 기득, 선수 출신으로서 축구인의 정체성 일부를 버렸다. 그는 객관적 진실을 바로 마주할 용기가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홍명보 현 감독이다. 그는 카타르 월드컵 시절 협회 전무였고, 지금과 다르게 전력강화위가 장기간 가져갈 철학을 가지고 감독을 선임할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가 국내리그 감독직에 있음에도 협회에서 후보에 올리는 것에 대해,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망치는 것에 분노하며 절대 맡지 않을 것이다, 소속팀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불과 1주일 뒤 그는 국가대표감독을 맡았다. '저를 버렸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 말 그대로다. 그는 우리가 믿고 기대하던, 한국 축구의 부흥에 힘쓸 영원한 리베로의 정체성을 내던졌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과 개인적 욕심을 위해서. 생각해 보면 그도 엘리트 코스로 2002 월드컵 주역의 이름으로 수차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한 번 미끄러지면 기회가 없는 흑수저들과 다르다. 그에게 특권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니 우리가 살았던 세상의 상식과 다르게.
회장이 빨리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는 한국축구의 미래에 방해가 되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주위 모든 사람들까지도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는 축구를 자기 것으로 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되는 게 왜 안 되는 건지 전혀 모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개인의 지성으로는 집단의 어리석은 행동을 고칠 수 없다.
3번이나 연임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이 곧 축구협회인 것 같이 조직의 의사표현으로 나타나고, 그 영향으로 사람들이 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조기축구모임도 잡는 경기장을 국가대표가 못 잡아서 호텔에서 체력훈련을 한다거나 유니폼 수급을 못해서 홈팀 유니폼을 입어야 할 때 원정팀 유니폼을 입는 등 말도 안 되는 행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축구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고, 그로써 비즈니스 혜택이나 의전을 누리는 것이다. 나와 같은 축구팬이 추구하는 한국축구의 30년 미래는 안중에 없다. 우리와 그들은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나는 누구인지, 그는 누구인지 깨닫고 나서 분노도 사그라 들었다. 그렇다 해도 강력해진 생각은 그가 어서 빨리 축구계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주의해야 할 것은, 나의 축구팬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인식이 편향되어 상황에 과잉반응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정체성, 주관,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것에 영향을 받는지 알았기에,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나와 상대의 정체성과 그 괴리를 이해함으로써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참고도서: <아이덴티티> 제이 반 바벨, 도미닉 패커 지음, 허선영 옮김, 상상스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