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어쩌다, 캘리포니아 변호사 (프롤로그)

나는 변호사다. 어쩌다보니 이제 약 2주 뒤면 벌써 10년차가 된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고, 한국에서 대학과 로스쿨을 나왔으며, 한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캘리포니아에 와서 산지 어느덧 4년차를 앞두고 있다. 


비록 작지만 나만의 개인사무실을 가지고 사무를 도와주는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변호사 개업을 이역만리 미국 땅에 와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사실 살다보니 어릴적 세웠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과학고와 KAIST, 이공계 테크트리를 타던 평범한 공대생은, 당연히 서카포 대학원을 가거나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엔지니어로 살아가야 하는 줄 알았다. 적어도 대학교 3학년때까지는. 


대학교 3학년 가을 무렵, 무심코 지원한 카투사(KATUSA)에 합격을 했다. 입대는 다음 해 8월, 약 9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학부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할 생각도 아닌데, 굳이 빨리 군복무를 해결해야 하는 특별한 필요성을 못느꼈다. 그래도 영어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군복무를 미리 마치면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가는데에 있어서는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입대를 결심했다. 물론 논산훈련소 입소 당일날 밤 불침번을 서는데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정말 감사하게도) 미군 부대에서 스테이크와 타코벨을 마음껏 먹으며 별 걱정없이 살아가던 상병 1호봉 즈음, 이제 전역을 딱 1년 남긴 무렵, 전역 후 뭐하지에 대한 고민이 세게 왔다. 미국 유학은 가고 싶은데, 전공하던 분야(산업공학)는 딱히 내 적성은 아닌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전공으로 유학을 갈 수는 있을까, 어드미션을 한 곳이라도 받을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지배하면서, 얼마전 부대 안으로 들고 들어온 <해커스 슈퍼보카>를 습관처럼 Day 1에서 Day 3만 반복해서 보는 어제가 오늘 같은 나날이었다. 석사를 진학한 동기들과 미국 유명대학의 어드미션을 받았다는 동기나 선후배들 소식을 들을 때면, 다음 날 아침 PT를 위해 체육복 빨래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난 여기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고나면 하등의 쓸데없는) 과학고 조기졸업과 no휴학으로 점철된 speedy 인생 테크트리에 자부하던 나였는데, 처음으로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도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의 법률이 통과되었다는 뉴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스쿨? 다양한 배경지식을 갖춘 전문 변호사의 양성? 뭔가 Fancy해 보이는데?  


로스쿨 생활은 힘들면서도 서러웠지만, 나름의 추억과 낭만도 있었다. 초기 기수는 꿀 빨았다는 비판도 많지만, 그 당시에는 어딜 가나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그 누구 하나 토닥이며 "너흰 모두 잘 될거야"라고 위로해주는 선배도 없이 옆에 있는 동기들의 손만 잡고 안갯속을 걸어나갔다. 학점경쟁도 지금처럼 치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혹시 나만?) 동기들간의 동지애와 끈끈함이 컸다. 그렇게 감사하게도 변호사가 되었다. 


어쩌다보니 인하우스 변호사가 되어, 반복적인 출퇴근과 반복적인 계약서 검토,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라는 타성에 젖어 살아가던 무렵, 어느날 문득, 습관적으로 계약서의 준거법을 미국 뉴욕법, 캘리포니아법으로, 분쟁의 해결지를 뉴욕이나 LA, 혹은 싱가포르로 수정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뉴욕법이나 캘리포니아법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도 없는데, 그냥 막연히, 제3국의 법률이면 별 생각없이 미국법을 선택하는 내 자신이 무책임해 보였다. 적어도 미국법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미국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어쩌다보니 미국 캘리포니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훗! 나 이제 캘리포니아 변호사라고!"라는 철없는 근자감에 빠져있던 무렵, 회사에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 다시 현타가 왔다. 라이센스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에서 변호사로서의 실질적인 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변호사를 미국변호사로서 인정을 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 여전히 한국변호사일뿐이고, 하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으며, 내 미국변호사 자격증은 장롱면허가 될 것이 뻔해보였다. 미국에서 실제로 실무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일단 미국 로스쿨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왔지만, 애매한 경력의 외국인 변호사를 고용해줄 미국 회사는 생각보단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한국이라는 시장에 대한 마케팅과 영업의 차원에서 나를 활용하고 싶어했고, 한국 기업의 고객유치에 대한 확실한 guarantee가 없이는 채용이 어렵다는 답변도 여러 번 들었다. 운이 좋게도, 좋은 한국계 파트너 변호사분을 소개받아 실무를 직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로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비록 짧지만 소중한 업무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그랬었지만, 송무라는 옷이 나에겐 잘 맞지는 않았다. 로펌 내의 여러 훌륭한 변호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가진 탁월한 (litigator로서의) 능력을 과연 내가 갖출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나에게 더 잘 맞고 더 잘할 자신이 있는 옷으로 갈아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로펌에 들어가서는 그런 옷을 입기까지는 앞으로 10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아니, 10년이 지나도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은 훨씬 더 쌓이겠지만, 여기서 나고자란 것도 아닌 내가 법률에 대한 전문성 하나만으로 (특히 미국)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전에 도태되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한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미루지 말고 정말 내가 변호사로서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무모하지만 개업을 결심했다. 


그렇게, 어쩌다보니 캘리포니아에서 개업한 변호사가 되었다. 어쩌다보니 결정된 인생인 것 같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순간순간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들에 대해 기록해보고 싶었다. 그 흔적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