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천둥과 번개가 함께하는 한 밤중의 폭우. 04시 35분 버스. 집 앞의 도로마저 낯선 새벽의 출발. 자신이 등에 진 무게를 실감하게 하는 여행. 필요와 편의를 구분하기 어려운 준비물들의 선별이 여행자에게는 수능보다 어렵다. 최대한 가볍게 짐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즐겁다. 인생도 마찬가지라며 여행에서 얻은 교훈을 혼자만 아는 비밀처럼 말한다. 그런데 매번 무게는 똑같다. 그래서 매번 같은 교훈을 얻는다.
바보.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출국심사를 받는다. 어울림이 '심사'라는 단어가 긴장을 하게 한다고 한다. 태권도 심사가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한다. ^^ 심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경우마다는 다르겠지만 출국보다는 입국심사가 더 긴장이 된다. 이곳에서 나가도 되나요? 보다는 이곳에서 나를 받아줄 수 있나요? 가 더 긴장되지 않을까. 사랑을 고백하고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입국심사 아닌가. 당신 마음에 내가 들어갈 수 있나요? 아니.
카트만두. 택시를 타고 숙소 도착. 400루피. 가격 흥정은 나를 호구로 보지 않는 한 하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비싼 것은 인정해야 한다. 어울림을 옆에 세워놓고 투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여행자의 태도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야 한다. 이십 대의 젊은 청년 때와는 달라야지.
라떼는, 여행자들끼리 만나면 빠지지 않는 주제가 요금 후려치기 스킬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숙박료, 교통비, 입장료, 음식값 등을 누가 더 최저가로 후려쳤는지 경쟁을 하며 우쭐대기도 한다. 한 달간의 여행경비를 누가 가장 적게 들였는지도 열띤 경쟁 종목 중의 하나다. 보헤미안을 인증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효율이 지배하는 여행의 그림자다. 서로 비교를 하다가 자신이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되면 없던 후회와 원망이 생겨난다. 요령 없는 사람이 된다. 패배.
얼마나 패기? 가 넘치는 날들이었던가. 우리 돈으로 이삼백 원에 해당하는 몇 루피를 아껴보려고 그보다 더 귀한 시간을 아낌없이 버리는 과감한? 행동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여행의 경험을 하려는 욕구는 그랬었다. 지금 그랬다면 정말 구질구질했을 그 행동들이다.
그러나 같은 행동이라도 젊음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대상을 통과하면 그것은 집시의 열정으로 승화되고 남루한 그들의 모습에서는 천연의 아로마향이 풍겨 나온다. 젊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부럽다. (내가 늙었다는 것이 아니며 늙지도 않았다.)
짐을 풀고 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어울림은 복잡하고 낯선 거리와 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한다. 여행자에게 보내는 관심과 호객행위가 너무 싫고 짜증이 난다고 한다. 결국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계속해서 시간을 묻는다. 너무 심심해서 견딜 수 없다며 몸을 뒤척인다. 재미있는 거 없냐고 묻는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한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첫날이 될 것 같다.
어울림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여행이 별다른 게 없기는 하다. 집에 있는 것 보다도 재미가 없다. 조금 색다른 여행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른 것이다. 어울림의 취향은 무엇일까. "아빠 내가 못 버티고 돌아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어울림이 내게 묻는다. 나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내가 처음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던 그 막연함이 어울림에게도 도착했을까. 막연함 속에서는 마음의 진정을 이루기가 어렵다. 좋지 않은 상황이라도 확실성을 가질 때는 불안의 자리에 실망이라는 안정적인 감정으로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막연함은 진정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있어보고 도저히 참기 힘들면 그냥 돌아가도 돼." 내가 말한다. 아니, 말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을 쓰다가 궁금해서 어울림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며칠 지내보면 익숙해질 거야. 이런 식의 말이 아니고. 잘했네. 오래된 나에게 지금에서야 칭찬을 한다. 어울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여름에 내가 한 말을.
그 대답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선명한 기억 하나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어울림에 대한 지금의 기억을. "저기요. 하나 더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