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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books Aug 02. 2020

휴가가 필요해

보르도 여행기

프랑스인들이 휴가를 가장 많이 떠나는 7월~8월 사이의 파리는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를 연상시킨다. 그 많던 파리지앵들은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바닷가로 산으로 떠난다. 이 위기 속에서도 휴가는 가야 하고, 다른 유럽으로 가자니 무서운 분위기 속에 프랑스 국내여행을 선호하는 여행객들이 늘었다.


해가 좋은 날에는 근처 공원에서 수영복만 입고도 선탠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동안 집에 갇혀 지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물론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바깥활동이 잦은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신기하리만큼 3개월 동안 집 밖으로 발 한 자국 떼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 후유증은 뒤늦게 나타났다.


무언가를 부지런히 계획하고, 새로운 걸 찾아 나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3개월 동안 욕구를 억누르고 있다 보니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고,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고 뒷발로 발길질을 해도 나아가지 않는 그 기분. 무엇이 필요한 걸까.


"Il faut se deconnecter du  monde"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선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현실'을 잠시 뒤로하고 온전한 '쉼'을 내게 허락하는 게 필요했던 거다.


Miroir d'eau, Bordeaux


우리는 그렇게 보르도로 여행을 떠났다. 알람 없이 늦잠도 자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고급 요리도 음미해보며 즐기고, 밤늦게까지 모르는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내려놓고, 책임감도  다 던져두고 온 가벼운 상태로 기차에 올라탔다. 업무로 오는 연락도 정중하게(?) 받지 않았다.


기차로 2시간만 달려도 파리와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널찍한 도로와 깨끗한 거리, 여유로운 발걸음. 가까이 보면 현실이지만 멀리 보면 희극인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이 여행도 일상이 되면 현실 같아진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게 여행이지 않은가.


La grande maison de  Bernard Magrez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멋진 곳에서 세 시간 동안 점심을 즐겼다. 가격 때문에 들만한 죄책감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저 지친 영혼을 위해 쉼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으로 회복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좋았다. 입맛을 돋우기 위해 셰프가 준비한 아뮤즈 부쉬의 종류만 해도 다섯 가지나 되었다.


손톱만 한 크기의 한 입거리 요리지만 그 아담함에서 퍼지는 맛의 오묘함과 신선함은 먹어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글로 표현하는 게 부족한 걸 이렇게 변명해보려는 시도..)

와인은 잘 마시지 않지만, 6가지 코스요리에 어울리는 4가지 와인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말에 솔깃해 한 모금씩만 마셔보겠다고 했다.


문어와 생선요리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는 과일향이 가득하고 가벼운 화이트 와인을 페어링 했다. 메인 디쉬로 넘어가며 숙성된 오리고기 요리에는 묵직한 레드와인이 곁들여졌다. 디저트에 앞서 보르도 와이너리에서 오랫동안 숙성한 달달한 와인을 마시고, 기분도 좋아졌다. 달달하며 쌉싸름하며 알딸딸한 이맛. 취하고 싶은 한 여름날이다.


 평소 먹는 양보다 더 작게 조각내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음식에 집중해본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그 시간을 기꺼이 소비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지금 나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모든 감각을 이용해 본연의 재료와 한데 어우러진 소스에 들어간 마지막 시즈닝까지도 맞춰보겠다는 미션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먹는 것이다.


즐겁다. 여행이 아니라면 언제 해보겠는가.

Bordeaux

밤거리는 시원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걷기 위해 주위를 살필일도 없었다. 두 손 가볍게 나온 것도 가벼움을 더하는 데 한 목 했다.


가볍게 더 가볍게.


서른이 넘고, 많은 책임과 의무가 늘어나면서 나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하다. 무의식적으로 '더 많이'를 외칠 때, 무거워진 어깨를 의식하고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의식적으로도 가벼워지지 못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 된다. 물리적으로 일상에서 멀어진 후에 가벼움을 경험하면, 그 가벼움이 좋아 저절로 내려놓음에 집중하게 된다.


고작 이틀 밤, 3일 낮을 새로운 도시에 나를 옮겨놓았을 뿐인데, 미래를 가볍게 살아낼 '추억'을 쌓았다. 또다시 무거워지려 한다면 보르도 여행의 사진첩을 꺼내보며 가벼워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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