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교환학생 실패기_03
ㅣ스페인 여행기_2부
스페인은 여러모로 나를 회복시켜준 곳이었는데, 그 첫 번째 요인은 햇살이었고, 두 번째 요인은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교환학생 신청 국가로 네덜란드를 선정했던 이유는 영어였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유럽 중에 두 번째로 영어를 잘하는 국가이다.(첫 번째 국가는 영국이니, 말 다했다.) 네덜란드 고유 언어인 더치가 있지만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영어로 소통하는데 아무 무리가 없다. 어눌한 더치 발음으로 떠듬떠듬 물어보느니, 차라리 영어로 물어보는 것을 더 편해할 정도이다.
또한 네덜란드는 주위 많은 유럽 국가에서 교환학생을 오는 국가이기도 하다. 처음 디자인과의 수업을 들어갔을 때, 한 반에 덴마크, 아일랜드, 미국, 벨기에 등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영어를 하는 나는 늘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빠른 영어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긴장감에 입도 잘 떨어지지 않았었다. '나는 영어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위축되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런 한 달간의 고생 후에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나를 살린 것은 영어였다. 생각보다 스페인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다수 음식점에서 간단한 영어로 주문만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입을 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호스텔에서 조식을 먹다 독일인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친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친구와 영어로 수다를 떨며 그 친구가 "You speak good English."라고 했을 때 참 위로가 되었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어 '그래! 나 그래도 쫌 괜찮은 사람이었어!'라고 변화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스페인 여행 중 영어로 대화를 한 기회가 두 번이 더 있었는데 한 번은 영국인 노부부와, 또 한 번은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영국 청년과였다.
영국인 노부부와는 알람브라 궁전을 보는 전망대에서 만났다. 특별한 일정도, 많이 둘러볼 욕심도 없던 터라 일찍 전망대에 가서 일몰을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전망대의 맨 앞에 앉아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조금은 질려있는 찰나에 옆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영어였다. 옆을 보니 영국인 노부부가 나와 같이 담벼락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절벽처럼 되어있는 담벼락이라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그곳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커플을 보고 조금 놀랐었다. 문득문득 그들을 쳐다보았는데 경치와 너무 잘 어울리는 모습에 반했다. 이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를 라디오삼아 지루함을 달랬다. 또 이렇게 찾아온 대화의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아서, 잠시 격렬히 고민하다 말을 붙였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려서 말을 걸었다. 내가 카메라로 좀 찍어드려도 되겠냐.'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꽤 길게 이어졌고, 나의 신세한탄으로 귀결됐다.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고. 대화 중 그 부부도 '너도 영어를 잘하는데?'라고 해주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는 한국인중에서 제일 잘한다'라고 해주었는데, 이는 영국에 사는 내 주위 사람들만 생각해보아도 거짓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그 격려와 칭찬의 말은 여행 중 나를 히죽히죽 웃게 하는 마법의 문장이 되었다.
ㅣ그때는 핸드폰으로는 보내드리지 못할 테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 있게 집주소를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만 갖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사진이다.
마지막 영국 청년과는 네덜란드로 돌아오기 위해 환승하는 비행기에서 만났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자마자 잠든 친구였는데, 기내에서 제공해주는 디저트인 그 친구의 에그타르트를 내가 지켜줌(?)으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 친구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영어를 잘한다는 격려를 들었는데, (이쯤 되니 의례적으로 표현하는 문구인가 싶기도 하다.) 세 번 연속 같은 말을 듣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세 번의 기회를 만난 것 자체가 여행보다 더 여행 같은 과정이었다. 그 당시 내가 조금만 더 노련했더라면 한 명쯤은 연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겠다. 바람처럼 스쳐가고 끝나버린 인연이지만, 자그마한 도전이 만들어냈던 기회였으므로 다음엔 조금 더 용기를 내보면 될 일이다.
다시 네덜란드의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니,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긴장감보다는 한결 자신감을 얻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계속 되뇌며 네덜란드의 둘째 달을 괜찮게 보낼 다짐을 했다. '그래, 이 정도면 꽤 괜찮아.'
오래전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넌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중 '꽤'라는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네가 최고야'라는 식의 무한 긍정은 나에게 거부감만 들 뿐이었는데, '꽤'라는 말은 '그래도 오목조목 살펴보면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은은하게 긍정해주는 말이니깐.
스페인 여행을 다시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이 문득문득 떠오르게 된다. 유난히 밝으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의 말은 여러모로 그때의 스페인을 닮아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여행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지금, 오늘의 어려움 앞에 풀죽어있는 나를 종종 마주한다. 노련하게는 아니지만 이럴때면 스페인에서의 만남을 생각해내곤 한다. 그리고 친구의 말까지도.
지금도 고군분투하며 각자의 생존기를 찍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꽤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