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아니었다
최근에 환자가 제 허리를 뒤에서 감쌌습니다.
순간 너무 당황해 “왜 이러세요,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더니 환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수선생님인 줄 알고 그랬다. 미안하다.”
사과처럼 했지만 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수선생님은 이런 행동을 받아주신다는 뜻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 답답했던 건, 병원에서 돌아온 반응이었습니다.
“그 환자한테 당분간 가지 말라.”
내가 성추행을 당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그 말뿐이었습니다. 그저 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현실.
이 일을 겪으니, 자연스럽게 투석실 신규 간호사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나는 수없이 많은 성추행을 겪었습니다.
혈압을 재며 팔을 만지는 행동,
“밖에서 맛있는 거 사줄게.”
“주말에 만나자.”
“내가 젊었으면 너랑 결혼했을 텐데.”
농담처럼 포장된 말과 행동이었지만,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업무 환경을 위협했습니다.
처음엔 나 자신을 탓했습니다. “내가 너무 웃어주고, 친절해서 그런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문제는 나의 태도가 아니라,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넘어가게 만드는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성추행을 반복했고, 나는 결국 결심했습니다.
“이건 CCTV에 다 찍혔습니다. 신고하겠습니다.”
하지만 끝내 신고는 하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CCTV 영상은 15일만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되는데,
내가 마음을 굳혔을 땐 이미 증거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무엇보다 매주 세 번씩 마주쳐야 하는 환자였습니다.
신고를 하면 결국 병원 안에서 큰 파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원장님과 수간호사 눈치, 동료들의 시선까지… 모든 것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 환자는 상태가 악화되어 요양병원으로 옮겨지면서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끝내 신고하지 못한 채 마음에 무거운 짐을 남겼습니다.
“환자가 아프니까 이해해라.”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넘어가라.”
병원 안에서는 늘 이런 말들이 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결국 간호사에게 침묵을 강요합니다.
그 침묵은 또 다른 피해를 낳고, 피해는 반복됩니다.
오늘 환자가 했던 “수 선생님인 줄 알고 그랬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건, 누군가 불쾌한 일을 겪어도 말하지 않고,
병원은 사건이 외부로 알려질까 쉬쉬하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참고 넘어가는 구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문화가
가해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고, 피해를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 침묵은 단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하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조용히 아파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혼자 감당해서는 안 됩니다.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했을 때 지지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