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결국 나의 진짜 마음 앞에 서다
학생 때부터 간호사는 나와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실습에 나가면서 그 확신은 점점 짙어졌다.
나는 늘 긴장했고, 실수를 반복했다.
“내가 정말 간호사를 할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졸업은 다가왔고, 나는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현실적인 선택은 종합병원이었고, 그렇게 병원에 들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쏟아지는 일,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들 속에서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고, 결국 퇴사했다.
그 뒤로 요양병원에 들어가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내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맞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떠올랐던 것이 바로 ‘혈액원 간호사’였다.
공공기관이라는 안정감,
야간과 주말이 보장되는 워라밸,
그리고 어쩐지 멋있어 보이는 이미지.
반신반의하며 처음으로 지원서를 넣었다.
사실 준비된 스펙은 없었다.
그저 “한번 넣어보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류에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 속 내 이름을 보고
놀라움과 함께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가능할지 몰라.”
면접장에선 긴장했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결국 불합격.
그 이후, 다짐했다.
“서류에 합격하면 무조건 붙을거야.”
면접학원까지 다니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모의면접을 거듭하면서
내 목소리, 표정, 시선 하나하나를 점검했고,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전하기 위해 애썼다.
동시에 실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투석실 간호사로 입사했고,
서류 우대사항도 하나씩 채워갔다.
컴퓨터활용능력 2급, 토익, 봉사활동, 헌혈, 청소년지도사 2급 자격증까지.
컴활은 독학으로,
토익은 노베이스에서 학원에 다니며 간신히 점수를 만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삶.
몸은 지쳤지만,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이 좋았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내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퇴근 후에는 지역아동센터로 가
초등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봉사도 했다.
아이들의 에너지를 따라가기엔 지쳤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친구를 괴롭히던 한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너 왜 친구 괴롭혀?”
그 아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깊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는 자주 다른 아이들을 밀치거나,
혼자 앉아 있거나, 갑자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처음엔 문제 행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곁에서 조금 더 지켜보니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행동엔 공통점이 있었다.
‘관심을 끌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
작은 칭찬에도 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기뻐했고,
내가 이름을 불러주면,
몇 번이고 되묻곤 했다.
“저요?”
“제가요?”
그 반응이 오히려 낯설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이름 안에’ 들어간다는 게 어색한 사람처럼.
그리고 문득, 이해됐다.
그 아이는 사랑받고 싶었던 거구나.
사랑받는 걸 몰라서,
사랑받는 법도 몰랐던 거구나.
그래서 화를 내고,
그래서 때리고,
그래서 더 크게 소리치고 있었던 거구나.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확신이 없었다.
누군가 한 번이라도
“넌 소중한 아이야”
라고 따뜻하게 말해준 적이 있었을까.
나는 아이를 다그치는 걸 멈추고,
더 자주 눈을 마주쳤다.
좋은 점을 찾으려 애썼고,
작은 행동에도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웃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혈액원에 합격할 수 있을까?’ 보다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걸린 준비는
청소년지도사 2급 자격증이었다.
강의를 듣고, 면접을 보고, 연수를 마치기까지
거의 2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내 마음이 진짜로 반응하는 방향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로 4년 동안 서류를 계속 넣었지만
계속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스펙을 하나하나 채워가며 준비했지만,
그때처럼 합격의 문턱은 쉽게 넘지 못했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더 준비해야 하는 걸까?’
지쳐가던 마음 한편에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이 길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이 맞을까?”
투석실에서의 4년.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됐다.
“나는 반복적인 루틴이 정말 잘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같은 시간, 같은 환자, 같은 IV, 같은 채혈…
몸은 익숙해졌지만, 마음은 점점 메말라갔다.
‘혈액원에 간다 해도 결국 비슷한 루틴의 반복일 텐데…
나는 그 안에서 진짜 만족하며 오래 일할 수 있을까?’
그 질문 끝에,
나는 도전을 멈추기로 했다.
아마 만약 최종 합격을 했더라도
결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자격증을 준비하며 느꼈던 작은 성취감,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알게 된 내 감정,
봉사활동 속에서 마주한
‘간호사 이전에, 나라는 사람’의 모습.
그 모든 경험이 모여
나에게 더 맞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진실.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고,
계속 벽에 부딪히기만 했던 이유.
반대로,
마음이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들은
애쓰지 않아도 조용히, 물 흐르듯 다가왔다.
‘아, 나는 나한테 안 맞는 걸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걸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면
그 목표가 정말 내 것이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하지만 도전은
늘 우리를 ‘더 나다운 삶’에 가까워지게 한다.
설령 그 끝이 실패일지라도,
그 안에서 당신만의 길은
조금씩,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열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