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부지 선풍기와 주말 아침에 찍는 공포영화
조금 지난 일 같은데 생각해 보면 벌써 수년 전의 일이라 흠칫 놀랄 때가 있다.
'이렇게 오래된 거였나?'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고개가 획! 획! 돌아가서 다시 돌아올 줄 모르는 우리 집 선풍기가 그렇다. 한국 와서 산 거니까 이제 16년이 되었다. 날개가 부러져 본드로 붙이기도 했고 테이프로 감기도 했다. 회복 불능이 되면 날개를 사서 다시 끼우기도 했다. 날개가 너무나 천천히 돌아 바람이 너무 약해져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콘덴서라는 부품이 고장 나 갈아 끼우기도 했다.
올여름, 너무나 힘들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마트에 가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꽃잎처럼 펼쳐진 날개를 가진, 리모컨이 딸린 뽀얀 선풍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할인을 하고 있다.
얘야, 우리 집에 가자!
박스를 뜯고 설명서를 대충보고 조립을 했다. 전기를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띵~ 소리가 났다. '웅~~'하는 모터 소리도 없이 '쌩쌩'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회전 스위치를 눌었다. 띵~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15년이 넘은 할부지 선풍기는 회전 스위치를 누르면 홱! 하고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딸깍거리기만 했다. 고쳐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더 이상 나사 박을 데가 없어 이제는 무리다.
할부지 선풍기 이제 편히 쉬게 해 드려도 되겠다. 아니 되고 싶었던 것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분리수거를 위해 해체를 시작했다.
앞 철망을 때고 날개 가운데 동그란 잠금을 풀면 날개가 분리된다. 부러진 자리에 붙였던 테이프가 아직 짱짱하게 붙어있다. 바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건 아마 이 테이프 때문이었으리라. 날개를 풀고 날개뒤에 있는 잠금을 풀면 뒤쪽 철망이 분리된다. 날개와 철망이 없으면 이미 선풍기의 모습은 아니다. 모터커버 뒤통수 나사를 십자드라이버로 풀어 모터커버를 분리한다. 솜뭉치가 있다. '한두 번 열어서 청소를 한 것 같은데...' 그게 몇 년 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쯤 되면 선풍기는 터미네이터가 되어있다.
몇 년 전에 수리한 콘덴서가 깜장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어있다. 커터로 전선을 톡톡 자른다. 전선을 고정했던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케이블타이를 자른다. 회전모터와 본체를 연결하던 나사를 풀고 모터를 붙들고 있던 나사도 풀어주면 모터헤드가 쑥! 빠진다. 꼬랑지같이 붙어있는 전선을 자르고 기둥고정 잠금을 풀면 분리수거 준비가 끝이 난다.
이제 2개만 더 해체하면 된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할부지 선풍기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나는 그들을 안심시킨다.
"할부지! 걱정하지 마세요! 멋지게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 이쯤 되면 공포영화인 듯싶다.
주말은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