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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un 28. 2020

백색왜성, 우리

백색왜성은 위대한 별들의 마지막 종착지다. 별은 소멸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만들어낸 물질을 우주 공간으로 내보낸다. 이것은 행성의 구성 물질이 되기도 하고 생명체의 구성 성분이 되기도 한다. 오랜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별은 백색왜성이 된다. 그리곤 천천히 식어가다가 마침내 빛을 내지 못하는 암체로 그 일생을 마감한다.

- 별의 죽음에 관하여, 한스 베테 


'별'은 어릴 적부터 늘 의문의 존재이면서 신기함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비구름이 가득하거나 몹시도 흐린 날이 아니라면 고개만 들어도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시골에 살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당연하게만 느끼고 마주했던 것들이 서울로 올라오며 조금씩 희미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놀랍게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대학에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며, 회사에 다니며 문득 밤하늘을 10초 이상 멍하니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무려 '해낼 수 없다'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정말이지 어려웠다. 내가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항상 무언가의 까닭으로 굉장히 무겁곤 했는데, 그 속에서 가벼이 고개를 든다는 것은 그것보다 몇 배는 슬픈 무게가 나갔다. 강남역 사거리, 시청 광장, 상암동 방송국 거리 한가운데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누군가 수군대기에 충분히 의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가도 가끔 멍을 때리고 있으면 상사에게는 그것이 감히 버릇없이 누리는 '사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반항'으로도 느끼셨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이를 먹다 보니 나는 마음에 영광의 생채기가 못나게 난 '어른'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별을 바라봤을 때 내게 보이는 빛들엔 나만의 이야기들이 어렴풋이 새겨졌다. 하지만 문제는 별이 내뿜는 빛의 밝기였다. 나는 빛의 희미해짐을 내가 서울에 올라와 사회와 사람을 겪어가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로 단단히 착각했다. 그래,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 살며 밝은 별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너무 힘이 들었던 하루를 겨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정류장도, 벤치도 아닌 애매한 길 한복판에서 그냥 멍하니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밝아 별을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별은 밝게 빛났는데 내게는 몹시도 어둡게만 보였다. 그때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충분히 밝은데, 나라는 별만이 서글프게도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빛을 내며 주위를 밝게 밝혀야 할 내가 벌써 희미해지는 백색왜성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여긴 서울이니까, 지금 내 하루하루가 힘겨우니까, 멀리 봐도 미래가 멋지게 그려지지 않으니까 남들에게도 서울의 별이 어두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별만이 어두웠음을 깨달은 그날, 나의 별이 백색왜성처럼 느껴졌던 것은 외부의 까닭이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었다. 결국 남들 탓, 환경 탓만 하며 별을 어둡게만 봤었는데 그것은 자꾸만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내 잘못이 아니었을까.


'사치'를 끝내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데 몇 년 전 들었던 혁오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내 헛간을 털어버린 나쁜 도둑놈을 잡으려고 이 잡듯이 뒤지는데 오갔던 발자국이 내 것 하나뿐이었다는. 텅 비워버린 범인이 사실은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오늘 하루의 누군가도 화려한 서울의 밤하늘 속에서 어두운 빛만을 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밝은 빛을 억지로 빛을 잃어가는 백색왜성으로 만든 것은 정작 우리일지도.

발 디딜 틈도 없이 나름 가득 채웠는데
어느 날 문을 여니 이런 도둑이 들었네

주위를 둘러보다 바닥을 훑어보니
오갔던 발자국이 내 것 하나뿐이네

- 혁오, <멋진 헛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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