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lemonade
이야기를 상상하며 내 머릿속을 탐구하고, 음악을 만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는 정말 영화에 내 음악을 삽입해 보고 싶다.’ 하는. 마침 1:1 수업을 받던 겨울 학기가 시작되기 막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이런 식으로 교수님과 수업을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영화를 고르는 일이었다. 러닝타임이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내가 좋아하고 있는 또는 좋아할지도 모르는, 나만을 드러낼 수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과 잘 어울릴만한 영화를 종일 찾다가 고른 것은 “Home with Olaf” 였다. 디즈니에서 짧은 단편으로 몇 편의 영화를 유튜브에 올려준 적이 있었는데 원체 올라프를 좋아했던 나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나오길 기다리며 재밌게 보던 학생이었다. 내 재생목록에 따로 추가해놓을만큼 평소에 잠깐씩 보는 편이었는데 문득 ‘아, 이거다!’ 하고 생각했다.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았고 올라프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였으며 근거는 없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처음에 만들었던 음악은 지금 업로드 해놓은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교수님께 들려드렸을 때, 교수님은 음악과 영화가 따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올라프의 움직임을 1초컷 단위로 조금 더 집중해서 보라는 말과 함께 음악을 다시 만들어오라는 피드백을 주셨다.
수업이 끝난 직후 나는 내가 만든 음악을 삽입한 핑크 레몬에이드편을 보고 나서 생각했다. ‘아 나는 올라프를 그려내지 못했구나.’ 그래서 다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 내가 만든 그 음악은 지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음악이 아니었다. 내가 만들어야 할 음악은 올라프로부터 나왔어야 했다.
이 경험은 훗날 지금의 나에게 엄청난 경험을 안겨줬다.
인물과 캐릭터를 알면 알수록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사용 범위는 넓어진다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다양한 악기를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한 악기라도 완전히 인물과 동화된 악기를 인물에게 정확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1초컷 단위로 올라프를 보기 시작했다. 일단 처음엔 일시 정지 없이 끝까지, 두 번째는 올라프의 목소리와 행동, 세 번째는 1초컷, 그런 식으로 영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라프였다.
“올라프는 어떤 눈사람인가.”
나는 올라프를 관객들에게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관객에게 어떤 성질과 모양으로 기억에 남게 할 수 있을까. 그 고민과 함께 올라프라는 눈사람을 알아야 비로소 나는 피아노를 두드릴 수 있었다. 올라프는 대체로 웃음이 많고, 맑았다. 금방 녹을지도 모르지만 여름을 동경하고 사랑에 호기심이 많다. 또 자신에게로 오는 새로운 변화에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고 밝은 영향을 준다. 내가 알고 있는 올라프의 모습은 대개 앞에 설명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잘 엮어 올라프를 표현해야 했다.
처음부터 생각한 악기는 클라리넷이었다. 나는 목관 악기들 중에서 클라리넷을 가장 좋아한다. 너무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음역대를 가진 것 같아서(주관적인 생각이다.) 들을 때마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래서 클라리넷 연주곡이나 솔로곡들을 자주 듣는 편이다. 나는 클라리넷을 올라프에게 주고 싶었다. 가장 첫 번째 이유로는 내가 좋아하는 악기를 좋아하는 캐릭터에게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너의 발걸음을 너무 가볍게만 표현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가진 악기들 중 부드럽고 묵직한 악기가 하나 있거든? 혹시 같이 들어보지 않을래?' 하는 생각으로 인트로에다 넣었다. 올라프가 등장하기 직전, 그의 성질과 모양을 닮아낸 악기로 그를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비올라였다. 아직 현악기에 대해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나는 바이올렛보다 비올라를 앞에 두고 싶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소리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현악기는 악기보다는 연주법에 더 중점을 뒀다. 레가토(legato)로는 도저히 올라프를 그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악기를 배제하면 되지 않을까, 클라리넷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묵직한 중저음이 올라프의 발바닥이었다면 그 위를 받쳐줄 올라프의 산뜻한 발걸음이 나에겐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피지카토(pizzato) 주법이었다. 나는 현악기의 주법 중 피지카토 주법을 정말 좋아한다. 작업할 때 이 부분에선 백프로 어울리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도 무조건 넣어보는 주법 중 하나다.
피지카토를 넣은 가장 큰 이유는 그 소리가 바로 내가 원하는 올라프의 발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할 땐 운이 좋게도 악기를 선택함과 동시에 멜로디가 곧바로 떠올라서 큰 일 없이 무탈하게 인트로를 곧장 만들어낼 수 있었다. 통통 튀는 악기들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앞부분만 반복적으로 틀어놓고 피아노를 치다 우연하게 어울리는 멜로디를 찾을 수 있게 됐다.
그 다음 작업들은 너무 순탄하고, 때로는 거침없이 써내려가서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영화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이야기의 세계관 속에서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며 작업하는 나는 현실의 나를 잘 챙기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미안한 말이기도 하지만..., 영화음악을 작업할 때의 현실에서의 나는 무척이나 고요하다. 원체 작업할 때 몸을 들썩거리면서 하기 보다는 굉장히 덤덤하게 써내려가는 편이긴 하지만, 영화음악을 할 땐 모든 주위가 다 고요하게 느껴진다. 그대신 내 머릿속은 인물, 캐릭터, 그리고 이야기에 갇힌 탓엔 흥분에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된다.
핑크 레몬에이드 작업도 그랬다.
만드는 내내 올라프에게 주고 싶은 악기와, 멜로디, 연주법들이 올라프들의 행동과 딱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쾌감에 중독되어 버린 것처럼 너무 재밌게 작업을 했다.
아주 처음에 만든 곡은 credit 배경음악이 되어줬다. 너무 잘 어울려서 아, 이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음악이었구나를 알게 됐다. 자리가 있는 음악. 그 음악들은 어떤 모양으로 또 내게 다가올까.
호흡이 긴 장편소설을 읽을 땐 특히나 더 인물들과 정이 생기는 것 같아서 나는 단편보다는 장편소설을 더 좋아한다. 소설, 만화책, 영화, 애니메이션, 동화책, 그림책,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보다보면 쉴 틈 없이 인물과 캐릭터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접했다. 글을 읽다보면 '터벅터벅', '사삭사삭' 같은 소리를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 나올 땐 저절로 그 소리를 상상했고, 그렇게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소리들을 잘 엮어서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에게 내가 느낀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말을 걸어오는 그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며칠 전 너무너무 행복하게 봤던 영화 엘리멘탈의 감독 피터 손의 인터뷰를 읽던 도중 좋아하는 문구를 발견했다.
“캐릭터가 설정되면 어느 순간에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해요.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작가에게 말하는 순간이 와요. 그건 정말 ‘어메이징’한 경험이에요. 그때부터는 제 의지를 캐릭터에게 강요할 수 없어요. 캐릭터가 양보를 안 하거든요.” - the NEIGHBOR
그 경험을 음악을 만들 때도 우연히 겪게 될 때가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재밌어지는 상상이다.
twitter : @yeonran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