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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Apr 09. 2023

전역 소감문

21년 가을의 끝자락에 입대해 23년 봄이 한창일 때 전역했다. 547일. 18개월이라는 시간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고 정직하게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지나고 보면 빠르게 간 것 같지만 또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항상 돌아볼 때만 빠르게 흐른다. 바라보고 있으면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 재빠르게 움직이는 애들 놀이처럼. 그렇게 묵묵히 인내할 수밖에 없었던 하루하루의 축적이 이어졌다.


군대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뭐냐고 지금 나에게 묻는다면 집합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침 점호, 식사 집합, 일과 집합 그리고 저녁 점호같이, 특히나 아침저녁으로 두 번의 점호는 '신성한' 행사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엄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아침저녁 둘 중에서 더 싫었던 것은 아침점호인데 대부분의 용사들이 그렇듯 나 또한 아침잠이 많아서 오전 여섯 시 반에 기상하는 것부터 너무 귀찮고 힘들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최대한 밍기적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침대에 들러붙어있다가 아침 점호 10분 전 방송이 나와야지 그제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전투복으로 환복하고 나섰다. 겨울이면 새벽에 굉장히 춥기 때문에 점호 때문에 연병장으로 나가는 행위부터 이미 전의를 상실한다. 그래서 간혹 기상환경이 좋지 않거나 그날 당직사령의 재량으로 실내점호를 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입대 초에는 기상나팔이 들리기도 전에 눈을 떠서 미리 옷을 갈아입고 침구류를 정리하고 복도로 나가서 선임들을 기다렸지만 군생활 끝까지 신병 때의 부지런함을 유지하는 것은 극히 손에 꼽을 것이다(적어도 난 못했다).


입대하고 해가 바뀌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내게 입대 전의 운동이란 아파트 헬스장을 종종 가서 적당히 근육통이 생길 때까지 '운동'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뿐이었다. 눈에 띄는 육체의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몸을 두르는 지릿한 근육통을 느끼며 '오늘도 나는 운동을 했다'는 것에 만족하는, 지극히 얕은 수준의 자기만족에 그쳤다. 하물며 아는 것도 없어서 무식하게(강도는 낮지만) 쇠질만 했지 잘 챙겨 먹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을 해도 어째 점점 몸이 볼품없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먹는 것까지 운동이라는 유명한 말에 따르면 나는 그저 노동을 했던 것이다.


군대에는 운동을 좋아하고 또 열심히 하는 선임들이 많았다. 나는 쫄래쫄래 그들을 따라다니며 체단실을 갔고 곁눈질로 운동을 배우고 또 따라 했다. 군에 가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누구나 1년 6개월이라는 기간을 멍하게 보내지 않아야겠다 다짐하는 순간이 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와야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와야지, 수험 준비를 해야지 혹은 건강한 몸을 만들어 와야지 같이 어떻게 해야 동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보다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들 모두 나 또한 생각했던 것들이고 그중에서 전역날까지 꾸준히 실천한 건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변하는 신체가 주는 만족감이 원동력으로 작용한 덕이다. 반면, 피부에 와닿는 뚜렷한 향상이 없다면 의욕이 생기지 않고 쉽게 권태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지적재산을 쌓는 일은 그렇다. 어머니가 운동 적당히 하고 공부를 했어야지 하면서 핀잔을 줄 때면 'Sound Body Sound Mind'를 주장하며 건전한 정신상태를 만들어 후에 공부할 때 도움되게 하겠다고 피력하며 어물쩍 넘어갔다(어떤 공부를 할진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길 원한다. 사회에서 아들이 한 사람으로서 자립하는 수단이 전문적인 지식이었음 하고 바란다. 부모님 또한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직종, 혹은 지적능력이 본인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 내게 권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는 수능 공부를 해서 의학계열로 가길 바라는 소망이었고 그것이 좌절되고 나서 입학한 공과대학시절에는 약대 편입이라도 하길 바라는 바람으로 연결됐다. 정작 그 과정에서 아들은 소설가를 지망하게 됐으니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다.


돌아와서, 군대에서 건강한 신체 말고 얻은 것이 또 무엇인가 하면 인간관계에 있어 좀 더 유연해진 자신이라 말할 것이다. 좁은 울타리에서 -강제적으로- 벗어나서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내게 굉장한 고역이었다. 그래서 육훈소 입소 후 며칠은 입에 거미줄을 치고 살았다. 다행히 같은 분대원들이 서글서글하게 말도 붙여주고 관심을 가져줘서 비교적 일찍 마음의 문을 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입을 닫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사람과 장소, 심지어 생활패턴마저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예전보다는 덜 낯가리게 되고 불편을 덜 느끼게 됐다. 본성이 변했다기보다는 경험치가 쌓여서 '이 정도는 견딜만해'의 기준이 유해졌다. 사람에 관해서도, 한정적인 집단의 사람들만 만나던 때와는 달리 매우 다양한 인간유형을 만나다 보니 이 부분에서도 '그래,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대하는 게 형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쉽고 편했다. 나는 누나가 한 명 있고 동생은 없는데, 친구들의 남동생들을 만나면 무척 반가웠다. 친동생이 있었다면 잘 챙겨줄 자신이 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서 다른 동생들에게 대신했다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후임들이 여럿 생겼고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들이었다. 밖에서 만났으면 삼촌이라고 부르겠다고 하는 녀석들이 있을 정도니깐. 후임인데 심지어 동생이니깐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덕에 후임들도 나를 잘 따라줬고 나 또한 그들을 더욱 챙기게 되는, 양성 피드백이 우리에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대에는 전역자들에게 중대원들이 롤링페이퍼를 써주는 문화가 있다. 후임들이 써준 것을 보고 있으면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었구나 싶어 뿌듯하고 자신감이 생긴다. 사회에서 힘든 순간에 닥쳐 자신감도 자존감도 떨어질 때면 꺼내 읽어 용기를 되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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