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캄캄한 복도를 따라 걷고 있다. 한 박자씩 늦게 머리 위의 노란등이 켜졌다. 문을 열자 작은 종이 띵하고 울렸다. 종소리는 문이 닫힌 뒤에도 조금 더 이어졌다. 불이 꺼진 거실은 모든 생명체들이 깊은 겨울잠에 빠져버린 숲처럼 조용히 가라앉아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텔레비전의 소음과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기질의 소음이 현관까지 간간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익살스러운 효과음. 그 사이로 얕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서 작은 생명체의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부스스한 머릿결이 지성의 왼쪽 볼에 닿았다. 9살 터울의 동생 지우는 말없이 지성의 품에 안겼다.
"밥은 먹었어?" 지성의 물음에 지우는 고개만 좌우로 휙휙 내저을 뿐이었다.
"배고프지. 옷만 갈아입고 저녁 차려줄게."
냉장고에서 계란과 김치를 꺼냈다. 마트에서 할인할 때 사둔 스팸도 한통 따서 노릇하게 굽고 아침에 안쳐뒀던 밥을 삭삭 긁어내 식탁 위에 올렸다. 지성이 음식을 할 동안 지우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수저를 준비했다. 두 사람은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지성을 따라 지우도 나지막이 따라 했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수저를 놀려 식사를 했다. 배가 고팠는지 지우는 순식간에 밥공기를 비워버렸다. 지성은 자신의 밥을 덜어 지우의 밥그릇에 얹혀주고 큼직하게 스팸도 잘라줬다.
"천천히 먹어. 배고프면 더 해줄게."
지성은 잘 먹는 동생이 귀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얼마나 배가 고팠을지 생각하면 가슴 구석부터 저려왔다. 학교를 마치면 동급생들은 학원이니 피시방이니 각기 다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지성은 하나뿐인 동생을 챙기기 위해 바삐 집으로 향했다. 호르몬이 넘실거리는 사춘기 소년이라면 자신이 부모 노릇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못마땅할 수 있지만 지성은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해가 다르게 자라는 동생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그의 작은 행복이었다.
어머니는 지우를 낳고서 집을 나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지성과 포대기 속에서 잠들어 있는 지우를 두고서. 지성은 어머니가 떠나던 날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망설임이나 죄책감은 찾지 못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에는 어떠한 암시도 징조도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1년을 기점으로 어머니와 관련된 감정들은 증발해 버렸다. 어머니를 떠올려도 기쁨 슬픔 당혹 분노 연민 같은 것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어깨를 아프게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간 너무 애타게 어머니를 기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준우승에 그친 운동선수가 아쉽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아버지와 지성은 지우에게 어머니가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아버지는 지금 당장은 지우가 사실을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지성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 일을 어린 동생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동생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와 동의한 부분이라며 죄책감을 덜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지우는 아직까지 어머니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아니 믿고 있다. 너무 어릴 적 일이라 어머니에 관한 일화도 없고, 애초에 얼굴조차 기억 못 하기 때문에 지우는 어머니의 죽음을(물론 거짓이지만) 처음 접했을 때 의외로 무덤덤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동생에겐 어머니의 죽음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이의 부고 소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우가 어머니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설거지가 끝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지성은 장갑을 벗어 훌훌 털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지성아, 지우랑 저녁 먹었니? 반찬이 남아있었나 모르겠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아버지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서연 고모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전화를 걸어 우리 남매의 안부를 확인했다. 모성이 결여된 우리 가정이 가족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모의 노력을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다정하고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고모 덕에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지성은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동생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준 고모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도 육아에 무지했기 때문에 고모가 아니었다면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네, 집에 남은 반찬들로 잘 챙겨 먹었어요. 고모는 식사하셨어요?"
"나야 언제나 잘 먹고 다니지. 너무 잘 먹어서 걱정이다 정말. 이놈의 입맛은 나이를 먹어도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네. 조만간 찬거리 좀 챙겨서 집으로 갈게. 오빠는 아직 집에 안 왔니?" 고모의 쾌활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귀를 울렸다.
"아직 안 오셨어요. 곧 있음 집에 오시지 싶은데 전해드릴 말씀이라도 있나요?"
"아냐 아냐. 너네 밥 안 굶고 잘 지내고 있나 확인하러 전화한 것뿐이니깐. 조만간 반찬 들고 갈게."
두 사람의 안부를 확인하고서 고모는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짧은 통화였지만 고모가 이곳에 잠시 머물다간 기분이 들었다. 옆을 보니 어느새 지우가 다가와 있었다. "서연이 고모야?"
"응. 고모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렸어?"
지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어기 식탁에서도 들렸어."
지우의 대답에 지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모가 성량이 좋긴 하지."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띵 하고 종이 울린다.
"아빠 왔어. 음, 맛있는 냄새가 나네." 신발을 벗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왼발의 구두를 미처 벗지 못한 아버지에게 지우가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안녕 우리 딸! 머리가 부슬부슬하네. 아주 푹 잤나 봐." 아버지는 지우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일한 거야?" 지성이 아버지의 서류가방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일이 많았어. 저녁 먹으면 퇴근 시간이 더 늦어져서. 빨리 일부터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대충 먹으려 했지. 우리 딸 자기 전에 얼굴 봐야 하니깐." 아버지는 지우의 두 뺨을 양손으로 폭 가두려고 하다가 멈칫하고는 아차차 손부터 씻어야지 하면서 화장실로 갔다.
"반찬 별 거 없는데. 밥도 우리가 다 먹었어. 아빠 늦길래 당연히 먹고 오는 줄 알았지."
"걱정하지 마. 알아서 먹을게 신경 안 써도 돼." 세면대에 떨어지는 물소리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알았어. 잘 챙겨 먹어. 참, 아까 고모 전화 오셨어. 조만간 반찬 들고 오신대."
아버지는 수건에 손을 턱턱 닦아내고는 냉장고로 곧장 향했다. "그래? 서연이 걔는 바쁘지도 않나. 이렇게 된 거 오징어 채 좀 해와라 그래야겠어. 서연이가 오징어 채를 또 기가 막히게 하지." 뭘 먹으면 잘 먹었다 소문이 나려나. 추임새를 넣으며 저녁을 준비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지우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방 중 하나는 아버지가 쓰고 나머지 하나를 지성과 지우가 함께 쓰고 있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성이 혼자 방을 쓰도록 아버지가 제안했지만 지성이 동생과 함께 쓰겠다 하여 이렇게 배치가 됐다. 저녁을 먹고 나서 지성이 공부를 하면 지우도 지성을 따라 책을 읽는 두 사람의 루틴이 생겼다. 지우는 세계문학전집 같은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버겁지 않을까 싶은 두꺼운 책도 아무렇지 않게 읽곤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멈추고 지우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됐다. 지성은 앉아서 졸고 있는 동생을 조심스레 깨워 침대에 눕혔다. 지우가 다시 잠을 이어가는 걸 확인한 그는 방의 불을 끄고 책상의 스탠드등을 켰다.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아버지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우는 자?"
"응, 좀 전에 침대에 눕혔어."
아버지는 지우가 깰까 살금살금 다가가 새근거리는 지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막 잠에 든 지우가 몸을 들썩인다.
"너무 늦게까지 깨있진 말고. 아빠 먼저 잘게."
"알았어. 얼른 자. 오늘도 고생했어."
아버지는 지성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모두가 잠든 집에서 지성은 조금 더 깨어있었다. 새근거리는 지우의 코골이와 지성의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차분히 밤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