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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낸 해고, 손끝에서 멈춘 해고

기록되지 않는 상실에 관하여

제목 : 입 밖으로 낸 해고, 손끝에서 멈춘 해고 : 기록되지 않는 상실에 관하여

부제 :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글은 낙인이 된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시 쓰기 위한 심리학


주제 없는 호출, 그리고 일주일간의 침묵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비비안 그린 (Vivian Greene)


지난주, 본사로부터의 호출은 예고 없이 날아든 화살과 같았습니다. '출장'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주제가 없었습니다.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은 기류처럼 흔들렸고,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22년. 내 젊음을 갈아 넣었던 시간은 "경영상의 이유"라는 짧은 문장으로 압축되어 내 앞에 놓였습니다. 퇴사 통보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일상은 겉보기엔 평온했습니다. 나는 꽤 쿨한 척했습니다. 지인들을 만나면 "나 짤렸어"라고 덤덤하게 말했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오히려 웃으며 "이참에 좀 쉬지 뭐"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입으로는 그랬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나의 불행은 가벼운 가십이나 농담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하얀 모니터 화면을 마주하면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볼 때마다 손가락이 굳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가장 큰 사건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절대 기록하고 싶지 않은 저항감이 충돌했습니다. 말로는 수없이 뱉어낸 그 사실이, 왜 글로는 단 한 줄도 써지지 않는 것일까요? 지난 일주일, 나는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구술(Orality)과 기술(Literacy)의 괴리


"글쓰기는 11센트짜리 펜과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피를 말리는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나의 '입'과 나의 '손'이 서로 다른 자아를 연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술성(Orality)의 세계에서 나는 강인한 생존자였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의 해고는 '지나가는 에피소드'였고,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나의 감정을 조절하며 상황을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말은 휘발됩니다. 뱉는 순간 사라지기에, 그 무게감도 순간적입니다.

반면 기술성(Literacy), 즉 글쓰기의 세계에서 나는 나약한 패배자로 느껴졌습니다. 빈 화면에 "나는 해고당했다"라고 적는 순간, 그 문장은 지워지지 않는 물성(物性)을 획득합니다. 모니터 속의 글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이것이 너의 현실이다"라고 확정 짓는 판결문 같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말했음에도 글이 써지지 않는 현상. 이것은 단순한 작가의 벽(Writer's Block)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무의식이 보내는 강력한 방어기제 신호였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사정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 같다는 느낌, 그것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저항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함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 메리앤 윌리엄슨 (Marianne Williamson)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심리학적, 이론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텍스트의 영속성과 공개 선언 효과 (Public Commitment Effect)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는 '일관성의 법칙'을 이야기하며,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나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글로 작성)하면 그것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말은 상황에 따라 번복하거나 뉘앙스를 바꿀 수 있지만, 글은 '박제'됩니다. 내가 퇴사 사실을 글로 쓰는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공식적인 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나의 무의식은 아직 '해고된 자'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글로 확정 짓는 행위(Commitment)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로 쓴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최종적인 '확인 사살'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2) 대상화(Objectification)의 두려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글을 써서 발행한다는 것은 나를 타인의 시선 앞에 '대상화'하는 행위입니다. 지인들과의 대화는 상호작용이지만, 브런치와 같은 플랫폼에 글을 쓰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치부를 전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명 효과(Spotlight Effect)'와 연결됩니다. 실제보다 남들이 나를 더 주시하고 있다고 느끼는 현상입니다. "내 사정을 공개하는 것만 같아서"라는 주저함은,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나를 '능력 없어서 짤린 사람'으로 낙인찍을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3) 인지부조화와 자아 방어기제

프로이트의 방어기제 중 '부인(Denial)'과 '합리화(Rationalization)'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말로는 "괜찮아"라고 했지만,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상황을 깔끔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글쓰기는 고도의 인지 능력을 요하는 메타인지 활동입니다. 글을 쓰려면 자신을 객관화해야 하는데,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상처를 헤집어 분석하려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Pennebaker) 교수의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치유가 되지만, 단기적으로는 부정적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내 뇌는 본능적으로 그 고통을 피하고자 '글쓰기 거부'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해석자'로 서기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다."

– 루미 (Rumi)


그렇다면 이 침묵을 어떻게 깨뜨려야 할까요? 해결책은 관점의 전환(Reframing)에 있습니다.

1) 글쓰기의 목적 재설정: 노출이 아닌 직면

글을 쓰는 행위를 '남에게 내 불행을 전시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영원히 쓸 수 없습니다. 대신 글쓰기를 '나의 혼란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선택과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해고(자극)와 나의 감정(반응) 사이,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이 바로 글쓰기입니다. 나는 불행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해석할 권리를 되찾는 것입니다..


2)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의 재구성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Dan McAdams)는 우리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곧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버려진 회사원'이라는 이야기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펜을 드는 순간 나는 '시련을 겪고 새로운 챕터를 여는 주인공'이 됩니다. '퇴사'를 실패가 아닌 '전환(Transition)'으로 규정하는 글을 써야 합니다. 학술적으로 이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사건의 서술자가 되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침묵을 깨는 3단계 글쓰기


"시작하는 방법은 그만 말하고 이제 행동하는 것이다."

–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시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해법을 제시합니다.

Step 1. '나'를 위한 비공개 프리라이팅 (Free Writing)

처음부터 발행 버튼을 누를 생각으로 쓰면 검열하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을 노트나 비밀 폴더를 엽니다. 그리고 맞춤법이나 논리 따위는 무시하고, 내면의 분노, 수치심, 억울함, 두려움을 배설하듯 쏟아내십시오. 페니베이커 교수의 연구처럼, 감정을 날 것으로 적어내려가는 과정 자체가 뇌의 편도체를 진정시킵니다. "쪽팔린다", "막막하다", "화가 난다"는 문장을 직접 타이핑하는 순간, 감정은 실체를 가지고 다루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Step 2. 거리 두기: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기

1인칭("나")으로 쓰는 것이 너무 아프다면, 잠시 소설가처럼 3인칭을 사용해 보십시오. "그는 갑자기 본사로 호출되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자기 거리 두기(Self-Distancing)' 기법은 심리학자 에던 크로스(Ethan Kross)가 제안한 방법으로, 압도적인 감정에 함몰되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게 해줍니다. 객관화가 되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Step 3. 의미 부여와 발행: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서사

충분히 감정을 쏟아내고 객관화했다면, 이제 다시 "나"로 돌아와 브런치에 발행할 글을 정리합니다. 단, 결론은 반드시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해고당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끝나야 합니다. '나의 사정'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사이트'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십시오. 22년의 경험, 갑작스러운 단절,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지침이 될 귀한 콘텐츠입니다. 나의 상처를 콘텐츠로 승화시키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해고된 직장인이 아니라 '작가'가 됩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를 찍으며


"우리가 작별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시작을 의미한다.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다."

– T.S. 엘리엇 (T.S. Eliot)


일주일간 나를 괴롭혔던 글쓰기의 침묵은, 어쩌면 내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둑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감정도 흐르게 두지 않으면 곪습니다.

말로는 쿨하게 넘겼던 해고 통보를, 이제는 글이라는 정직한 그릇에 담아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가 두려웠던 이유는 그것이 내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깨닫습니다. 쓰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고,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수용이며, 수용해야만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본사의 호출이 있었던 지난주, 나는 타의에 의해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오늘, 브런치 글을 씀으로써 나는 자의로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글을 쓸 수 없었던 나를 글로 씀으로써, 비로소 나는 나의 해고와 화해합니다.

22년의 한 챕터가 닫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나는 새로운 챕터의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아주 긴, 그리고 흥미진진한 다음 문단을 위한 쉼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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