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써줘서 고마워!"

feat. 펜의 관점에서 글쓰기


"끝까지 써줘서 고마워!"

나는 Hi-Tec C 0.3mm 검정색 펜이다. 내 주인은 나에게 집착한다.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할 때마다 나를 제일 먼저 뽑는다. 필통 속에는 모나미 12색 잉크 플러스펜, 나와 같은 Hi-Tec C 0.4mm 검정색 펜, Hi-Tec C 0.3mm 파랑색펜, Hi-Tec C 0.3mm 빨강색펜 중에서 언제나 내가 먼저 불려나간다.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

내 몸속의 잉크가 다 말라서 더 이상 글자를 남길 수 없게 없었을 때, 나는 오히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를 아껴만 두지 않고, 끝까지 써줘서 고맙다. 주인의 손길을 따라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지쳐서 '이제 더는 쓸모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마지막 한 줄을 쓰고도 행복하다. 주인은 일기를 매일 쓰고, 메모를 반복한다. 한 권, 두 권, 여러권의 책을 쓰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주인 자신의 시간을, 마음을, 담은 글로 달라졌다. 처음 일기를 쓸 때 주인의 글은 험상궂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 뒷담화, 불평, 불만.... 언제부턴가 부터 글이 달라졌다. 책쓰기 수업에서 뭘 배웠는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나를 제법이나 아끼는 듯했다. 가방 포켓 안쪽에 언제나 나를 걸어 뒀다. 달라진 주인을 보는 것 만으로도 좋다.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명은 다해가지만 행복하다.

나는 이제 곧 끝이날거다. 내 생명이 다 한 후에야 비로소 주인은 깨달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멋진 존재가 되었다는 걸. 내 뒤를 이어갈 다음 쌍둥이들도 내 기쁨이 이어지길 바래본다. 주인의 성장을 몸으로 느끼며 나는 다음생을 위해 재활용 봉투로 갈거다.

소명을 다한 끝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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