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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Sep 19. 2017

국정원, 안 가길 잘했다

박원순 관찰기 #4

요즘 국정원 때문에 뉴스가 들썩거린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국정원이라고 하면 아이리스의 이병헌과 김태희의 사탕키스를 떠올렸는데 요즘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이야기가 뉴스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박원순 서울시장이 MB를 고소고발했다. 박사장님 나이스샷! 그러고보니 진짜 사장님이긴 하네


박사장님 나이스샷!


나 역시 취직, 취업에 목매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 때 라디오 PD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MB정권)는 야속하게도 방송국 공채가 잘 뜨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그렇다보니 어린 마음에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남들처럼 노량진으로 가는 대신 종로로 향했다. 당시 국정원 전문학원(?)이 종로에 있었기에. 


언론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국정원 시험과 공부하는 과목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아는' 형이 내가 국가유공자 자녀임을 알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참고로 그 형은 생활문화연구소 직원(!)으로 나와 같이 뉴욕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 당시 그 형은 국가장학금으로 연수 중이었다. 대학생의 눈에는 정말 대단해보였다.


사실 공부 해야하는 과목은 재밌었다. 막스 베버부터 시작해서 애덤 스미스를 거쳐 플레밍까지 살아가면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다양한 학문을 개론 수준까지 접할 수 있었다. 이는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고 은근히 고시생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몰입할 수 있었다.


가산점만 믿고 국정원 시험에 도전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준비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큰 벽을 만났다. 바로 논술이었다. 글쓰기는 내가 가진 잔재주 중 얼마 안되는 그나마 삐죽 내밀 수 있는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오히려 걱정이 없었다. 학원 관계자와 상담을 받을 때도 서로가 큰 기대에 차 있었기에 논술이 문제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녀는,


"영웅학생 프로필을 봤는데요, 학교가 사실 최적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머지 요건들이 커버할 수 있는 조건이라 해볼 만 하겠어요. 결국 논술이 좌우할텐데 국문과랬죠?"


'...국문과랬죠?...문과랬죠?...과랬죠?...랬죠?...죠?'


그랬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이 학원은 학원장이 직접 1:1로 논술 첨삭을 해준다. 그리고 그 원장은 국정원 간부 출신이다(우와). 그러나 본격적으로 논술 첨삭을 받으면서 드디어 벽의 실체와 마주하게 됐다. 첨삭 내용을 요약하면 딱 하나다. 당시 원장에 따르면 국정원이 좋아하는 논술 기조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연적이므로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일부 국민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안고 가야한다'였다. 흐음...


논술 첨삭을 받으면서
드디어 벽의 실체와 마주하게 됐다


첨삭내용을 바탕으로 글의 논조를 180도 틀어야 했다. 내 글은 항상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자. 그리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게 약자는 아니었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결코 내가 가진 것을 잃기 싫은 개인적인 생각의 확장은 아녔다.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국가관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짧은 식견이었지만 마음으로 써내려 갔었다.


"역사적으로 되짚어볼 때 사회 전체적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사회적 약자들은 피해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 달콤한 열매는 희생을 감내했던 이들보다 아닌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이 돌아갔던 것은 아닌지 국가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이러한 순환이 반복되는 구조는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개선되어야 하며, 또한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가는 것에 우리는 더 부끄럽고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공무원이라면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거나, 못본 체 하다보니 '강요받은 희생의 악순환'이 축적되어 권력과 재산, 정보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결국 국가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 사이에 괴리감이 생겼다."


는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주제에 맞춰 논술을 심화시켜 나가다보니 원장은 난색을 표하기 일색이었다. 첨삭을 받으며 이런 고민들을 털어놓자 사회주의자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대답 대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했다. 보수 커밍아웃과 함께. 


대답 대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했다


이런 시간이 켜켜히 쌓이면서 논술 수업이 있는 날은 학원을 빼먹기 일쑤였다. 꽤 거금이었던 9개월치 학원비를 전부 지불한 상태였지만(여기 입원 조건이었기에... 당연히 환불도 안되고) 더이상 종각역으로 가는 1호선을 타지 않았다. 그곳에는 내가 생각한 정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내가 못간게 아니라 안간거야'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볼수록 안간게 아니라 못간게 맞겠다 싶다. 그들은 말 잘 듣고 대의(?)를 따를 줄 아는 애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말을 잘 듣는 애도 아니었고 대의를 따를 줄도 모르는 아이였다. 결국, 자격미달. (그리고 생각해보니 난 댓글도 잘 달 줄 모른다 ㅋ)


결국 자격미달


그렇게 십년을 돌아서 결국 공무원이 되어 있다. 앞서 논술에 밝힌 마음가짐을 간직한 채 서울시장의 미디어 비서관으로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MB를 고소한 사장님이 손석희와 함께 앉아 있다. 나는 지금 뉴스룸을 보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 가까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자기 아들과 딸이 음해 당하고, 하는 일마다 족족 훼방을 당했다. 그리고 어버이연합의 인신공격으로 무장한 시위를 견뎌내야 했다. 이를 통해 각종 루머가 양산되고 욕쟁이 아저씨 이미지까지 생겨버렸다. 그런데도 하필 그놈의 짤은 왜 그렇게 절묘한지... 이 모든 것들을 옆에서 보는 우리가 더 속상하지만, 어쩌겠나 그가 넘어서야할 무엇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나라면 진짜 속에서 열천불이 터졌을게다. 정치고 뭐고, 시장이고 뭐고 제압문건을 본 순간 MB를 찾아가서 멱살잡이라도 했을거다. 그게 내 성격이니까. 뒷일 생각 안하고 기냥 뒷통수를...! 으휴, 가슴 속에 터질 것 같은 분노는 감히 상상할 수도, 하기도 싫다. 후우...캄다운 캄다운


뒷일 생각 안하고 기냥 뒷통수를...!


침착하게 다시, 나는 지금 뉴스룸을 보고 있다. 아직 그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지만 조심스레 말을 이어간다. 억울한 걸 그 자리에서 다 털어놓고 싶었을거다. 죄다, 싹다. 아니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길고 긴 싸움에 자신이 최전선에 설 것을 다짐한다.


VOD 다시보기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나는 지금 뉴스룸을 보고 있다. 오늘 발언은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으로서, 지도자로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게 내가 요즘 접하는 '정치'라는 것이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은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분노를 대신 공론화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좋은 말이고, 이해도 간다. 그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그를 보고 있자니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온다. 물론 그가 택한 길이고 그가 견뎌야할 무게일테지만, 오늘만큼은 대신 울어주고 싶고, 대신 화를 내주고 싶다. 나는 훌륭한 참모는 아닌 것 같다. 정치라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다.


나는 훌륭한 참모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국정원에 못갔나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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