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한 법회에서 용서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다. (김진옥 동년기자)
용서란 단념이나 무관심과는 다르다. 단념은 다만 현실도피일 뿐이다. 결국, 용서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며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하니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필자에게도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날마다 우울했다. 멀리 있는 산사를 찾아다니며 법회에 참석했다. 눈을 반쯤 감고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데 말씀 가운데 “용감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압니다. 비겁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즉 용서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죠. 용서를 안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향한 마음의 칼날이 결국은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라고.
법회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마음이 너무 복잡해졌다. 수백 명의 신도가 있었지만 마치 필자한테 하신 말씀 같았다.
몇 달이 지나도록 큰스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마음의 날카로움을 행여 남에게 들킬세라 전전긍긍했다. 오랫동안 아팠다.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결국은 용서가 아닌, 포기라는 둘러댐으로 마음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절반의 용서를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다. 결국은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제 큰일을 겪고 나니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웬만한 일은 넘겨버린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고통도 인생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때로는 자신을 깨우치게도 한다. 지나간 시간은 기쁨이나 혹은 슬픔으로 채워졌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다. 그러니 용서를 했건 포기를 했건 이 또한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내가 즐겨 읊조리는 시구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다.
우리의 일상은 늘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이 살아갈 만한 이유는 사랑과 용서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 이루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 바가지의 물을 붓기 전에는 절대로 펌프 물을 끌어 올릴 수 없듯이 사랑도 용서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 앞에서는 망설임의 시간이 길지 않지만, 용서 앞에서 망설임의 시간은 매우 길고 힘들다. 때로는 억울한 생각에 몸과 마음을 상하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결국은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 위한 행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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