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by 오로라

나는 대형마트나 상가에 가면, 늘 사던 물건조차 잘 찾지 못한다.

눈으로 보고 다니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지나간 길에 뭐가 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니, 길을 잘 잃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어제도 가끔 들르는 다이소에서 늘 사는 커피 필터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아무에게도 묻고 싶지 않아 기어이 혼자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직원에게 도움을 받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런데, 나의 무심한 시선은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을 잘 포착하곤 한다.


지하철 안이었다. 그냥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그분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나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그 분은, 자세히 보니 단아한 옷차림, 상기된 표정에 기쁨이 가득했다.

유행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깔끔하고 검소한 느낌이었다.

얌전한 레이스는 가지런했고,

귀여운 모자와 자그마한 핸드백도 오래된 것이었지만 잘 관리되어 낡은 기색이 없었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였다.

나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는데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에너지에 이끌리듯 나도 모르게 그 할머니 앞으로 갔다.


"할머니, 어쩜 이렇게 고우세요?"

처음엔 깜짝 놀라시더니, 이내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아유, 색시가 더 곱지. 무슨 말이야?"

"아니에요, 정말 멋지세요. 지금 이 지하철 안에서 제일 빛나세요."

짧은 대화였지만, 할머니는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던 것도 같고,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 숙제 다 했다. 이제 놀러 간다.’

그래, 자식들도 다 키우고, 시집·장가도 다 보내고, 숙명처럼 감당해온 일들을 이제는 마치신 모양이구나.

가녀리고 작은 몸매의 할머니는 가볍게 지하철을 떠나셨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는 도심의 어느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차라리 할머니가 됐으면 좋겠어.”

그 말은 나의 젊은 시절, 어느 순간처럼 가슴에 꽂혔다.

뒤돌아보았다. 20대의 앳된 여성 둘이 대화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의 20대 시절도 만만치 않았다. 참 많은 일들이 버거웠었다.


다시 티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노령의 유명한 소설가가 20대들에게 물었다.

“내 명예와 부를 모두 드릴 테니, 당신의 젊음과 바꾸시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관객 중 어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고통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시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고민과 괴로움이 나에게는 있었다.

정말 끝을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마치 당시에는 최고로 멋진 배우라며 흠모했던 사람이,

지금은 도대체 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인생은 살아가기도 했지만, 어느새 살아져 있기도 했다.

노래가사도 있지 않은가. '살다 보면 살아진다'라고


그 할머니를 만난 건 20여년 전이었다.

그 시절과 이 시대는 참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이제 제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치여 있다.


숙제는 언제 끝나는 걸까.

나도 언젠가 저렇게 가볍게 걸어 나갈 수 있을까?


할머니의 홀가분과 세상 속 힘겨운 버티기에 조용히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