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keep going.

그래, 계속 가다보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by Not yet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란, 무모하고 소용도 없는 일을 다시 펼치겠다는 허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나는 단거리 선수 같기도 하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또 현실적인 변명으로 녹아 사라질 것이 뻔한데도 다시 출발하는 철부지다. 어른들 말대로 시작만 하고 끝장을 못 보는 한심한 인간일 수도 있다. 이게 무슨 근성인지, 끈기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언젠가 무엇이 되어 만나리라는 어설픈 확신 같은 게 있는 내 안에 숨어있는 모양이다.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나의 집착은 2013년쯤 소리 소문 없이 시작되었다. 당시 독서모임을 하던 몇몇이 모여 문화콘텐츠를 기획하는 작은 회사를 만들었다. 직업이 없었던 탓일까, 통장을 만드는 게 가장 빨라서였을까. 어쩌다 보니 내 앞으로 개인사업자를 내고 자그마한 사무실도 얻었다. 대단한 행사를 치른 것은 아니었지만 세련되고 특색있는 기획으로 나름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질 정도의 활동을 이어갔다.


가끔씩 서울이나 타 지역 행사까지 섭렵하며 분주한 몇 년을 보냈지만, 주로 기관 일이 많다 보니 관스러운 일 처리 방식과 영원히 ‘을’에서 못 벗어날 거라는 작금의 두려움, 행사의 특성상 철수를 하고 난 뒤의 허전함까지 더해져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이때부터였을까, 우리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이름 모를 갈망이 생겨났다. 브랜드가 무엇인지, 얼마만큼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막연히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다.


본격적으로 2015년, 1인 가구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시작은 여성용품인 생리대를 소분하고 큐레이션해서 정기배송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엔 정부 지원금이 넘쳐나던 때라 서류를 내기만 하면 합격 소식이 돌아오곤 했다. 지원사업과 공모전을 통해 대략 1억 가까운 자금을 확보하고, 규모는 작았지만 큰 꿈을 담은 플랫폼도 구축해갔다. 실리콘밸리까지 가서 피칭도 하고, 방송이나 인터뷰, 강연까지 하며 마치 한국의 마크 주커버거가 되어 전세계에서 사업을 펼치겠다는 열의가 부풀어 올랐다.


여전히 자금은 부족했지만 저가 항공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가 캡슐 호텔에 몸을 구겨 넣고 자면서 해외 동향이나 트렌드도 나름 살폈다. 이때, 스몰 비즈니스나 브랜딩 관련 책을 엄청나게 읽었던 것 같다. 괜찮은 서비스와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사업은 바람대로 순조롭지 못했다.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거센 광풍을 서너 차례 정면으로 맞으며, 함께 운영하던 기획회사마저도 결국 멈추게 되었다. 죽어도 끝까지 함께 가겠다던 멤버들은 현실 앞에 무너졌고, 몇몇과의 관계는 틀어져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살면서 스스로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서야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때 나는 더 잘했어야 했다. 나에게 온 모든 사람들과 시선과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내 몸과 마음도 금쪽같이 아꼈어야 했다. 다쳤는지,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으스러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원금을 주던 센터에서는 그것이 바로 사업이라며, 사업가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말로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어쩌겠는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받아들일 수밖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무척 무지 무진장 힘들고,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었든 척, 잘 지내고 있다는 식의 덤덤한 글들을 SNS에 올리며 나의 추락을 끝까지 숨기려 애를 썼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나를 본 사람들은 느꼈으리라.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빛을 잃어가던 진짜 내 모습을.





얼마나 비관적인 상태었으면, 가게 창문에 적어 놓은 '테이크 아웃만 가능!'이라는 글자를 '안가능!'으로 읽을 정도였으니...


몇 달째 바닥을 치며 심해 속에 잠겨 지내던 어느 날, 대학원 담당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구과제가 있으니 함께해 보지 않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과 별다른 대화도 나눈 적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 했다. 금액이 크지는 않았지만 한 달 동안 전국 13곳을 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과업이었다. 차마 은사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기도 했고, 돈도 필요했던 처지라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하겠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이 늘 계획대로 되지 않듯,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글을 짓는 창작자들, 즉 작가이거나 작가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얼마나 깊은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해 겨울은 처음으로 걸어온 인생 전반을 돌아보고,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는 수련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힘든 창작의 과정을 겪어야 아니, 견디는 걸까.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닐 텐데,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질기게 끌고 가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가들의 끈질김과 나의 나태와 우울이 매일 충돌하며 소용돌이를 쳐댔다.


사업 실패 뿐만 아니라, 유독 사람을 좋아했던 나에게 누군가와의 이별이 엄청난 상실을 몰고 온다는 것도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함께 하며 가족 같이 지냈던 동생 S, 가장 믿고 의지했던 친구 K와의 좋지 않은 이별까지. 가치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비관적인 생각은 육체마저 지배하게 되었다. 길을 걷다 갑자기 숨을 못쉬고 쓰러지거나 작은 자극에도 사지가 마비되는 등 극심한 공황장애와 불안 증상을 겪게 된다.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었는데, 말이 치료지 우울증 약과 신경안정제, 그리고 의사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가 전부였다. 당신은 아픈 말을 타고 달리고 있어요. 말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고 하는데, 자꾸만 채찍질을 하니 병이 날 수밖에요. 뭐 이런 식의 뻔한 대화를 나눴다. 효과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약과 상담을 받아서라도 살려고 애를 쓴 건 가족들 때문이었으리라.


아무튼,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했던 나는 자의반 타의반 전국을 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큰둥 듣던 이야기들이 돌아오는 발걸음을 붙잡으며 뭉클한 감정마저 들게 만들었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기사 역할을 해주던 H와 함께 긴 이동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치료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작은 걸음을 시작으로 다음 해 여름이 되어서야 마침내 모든 정신과 약을 끊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많은 이들과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미용 교육과 국제자격 회사의 총괄 운영 전무로 일하며 몽골,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홰외 출장도 여러 곳 다니며 열정적으로 지냈다. 미혼모와 청소년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거나 제휴 관련 회사의 기획팀 이사로도 일했다.


그뿐이 아니다. 모빌리티 서비스와 개발사에서 기획 이사로 일하며 여러 앱 서비스를 기획하기도 했고, 수년간 대형 행사에서 비즈니스 매칭 관련 일들을 진행하거나 홈페이지 제작, 다양한 회사의 브랜딩과 사업계획서를 만들며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렇게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던 그 날로부터 약 8년간의 이야기다.


정신이 없을 만큼 새로운 일과 사람이 밀려왔다. 내 능력 이상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고, 낯선 사람들과 환경에 적응한다는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직업 달인이 아닌가 싶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에 운 좋게 투자자를 만나 재택근무자를 위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하기도 했고, 템플릿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이트를 만들거나, 친구와 함께 비누 전문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다.






중간중간 취미로 향수 덕질을 하는 인스타를 운영해 5천 명이 넘는 팔로워가 생겼고, 유명 브랜드로부터 향수를 협찬받는 일도 생겨났다.(나란 인간은 이때도 제대로 조향을 배워 보자며 조향사 주니어, 시니어 과정까지 거금을 들여 마스터 할 정도로 열정 그 잡채였다.)





하지만 결론은 모두 ‘스탑’이었다. 템플릿 판매 사이트와 월간 플래너 판매, 비즈니스 매칭 서비스 관련 일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 한 달을 버티기 위한 일상의 일들이다. 아! 그러고 보니 책을 몇 권 사보며 취미로 작사를 시작했는데, 세상이 좋아진지라 AI를 통해 작곡을 하기도 했다. 총 8곡이 수록된 첫 앨범을 발매하고, 유통사를 통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서비스가 시작 되던 날은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신기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메인 잡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음…엉뚱하겠지만 버티컬(에이블리, 지그재그), 스마트스토어, 자사몰에서 의류를 판매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돌고 돌아 겨우 옷을 팔고 있냐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유는 분명하다.


쉽게 지치지 않고 오래할 수 있는 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날 때 도망갈 수 없는 온전히 좋아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사실 앱 서비스를 기획할 때는 수입이 꽤 높았다. 여러 회사의 일을 했는데, 평소 처럼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날이었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는데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단지, 노을을 봤을 뿐인데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왔다는 것을 순간 깨닫게 되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개발자들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쥐어 뜯거나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영혼을 갉아먹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물론 어떤 일이든 미쳐야 할 때가 있겠지만, 그 과정을 온전히 지나온 나로서는 다시 돌아가는 선택은 피하고 싶은 거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게, 사랑하며 오래 하고 싶다.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과거 인생에서 스스로 한 첫 선택이 대학인데(나는 대학마저도 편입과 석사 과정까지 다소 많은 전공을 이수했다.), 이때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부친 전공이 바로 의상학이었다.


여기서 잠깐, ‘왜 의상과에 갔을까?’ 질문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란 인간은 ‘옷을 너무 좋아하니까’다. 좀 더 고급스럽게 말한다면 빠숀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말이 되시겠다.


어릴 때부터 옷 입는 걸 유독 좋아했다. 선호하거나 정해진 스타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변덕스러운 취향 덕에 클래식, 빈티지, 히피, 스포티, 캐주얼, 베이직 등 모든 스타일을 좋아했고, 나이의 변화와 상관없이 입고 다녔던 것 같다. 옷장에 더 이상 들어갈 공간도 없을 때조차 주변에 나눔을 해서라도 다시 사고 마는 옷만큼은 맥시멀 리스트이기도 하다.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동네 내과로 엉거주춤 걸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거리의 쇼윈도 안 마네킹에 입힌 옷을 힐끔 바라보던 내 모습에 소름이 끼친 적이 있었다. 와! 이건 못 고치는 고질병이구나.


어쩌면 어딜 가나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을 듣던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와, 외동딸로 자란 덕분에 이것저것 엄마의 인형놀이 주인공이 되었던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옷을 팔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자 모든 일을 함께 해온 H에게 우리도 이제 한 땀 한 땀 픽셀을 옮기는 일 말고, 눈도 마음도 즐거운 일을 하자며 앞으로의 계획을 나름 진지하게, 속사포로 전했다. 그녀는 이 언니 또 시작이네 하면서도 늘 그랬듯 은근슬쩍 따라와 주었다. 솔직히 H는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지만, 남의 옷 평가는 기깔나게 하는 편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모든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이번 역시 '너 내 동료가 돼라'가 먹혔다고나 할까.


할 거면 제대로 하자며 2025년 여름 거금 200만 원을 주고 버티컬 강의를 신청하게 된다. 수강생 50명 중 1등으로 사업자를 내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첫 수익마저 내게 된다. 모두들 어떻게 한 거냐며 물어댔지만 좀 거만하게 말하자면, 그간의 수많은 직업과 서비스를 만들었던 우리에게는 손가락 하나로도 만들만한 만만한 미션이었던 거다. 사업자 그까이꺼 하면서.


현재는 작은 기획회사를 운영하며, 몇 몇 비즈니스 행사를 운영하기도 하고, 취미로 노래를 만들고, 옷을 팔고 있다. 아직까지 대단한 매출을 내거나 수익 구조를 만들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채 5개월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스타트 근성은 제대로 된 브랜드를 언젠가 만들고 말겠다는 고집과 만나 꺼지지 않는 불씨를 만들고 있다. 시작에 필요한 자금이 확보되거나 디테일한 방향이 잡힌 것도 아니다. 그건 뭐, 하나씩 해나가면 되니까.



첫 번째 앨범(애플뮤직, 스포티파이, 벅스뮤직, 플로, 바이브, 카카오뮤직, 지니뮤직 등)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 타오르지 않고 서서히 데워갈 수 있도록 느긋함을 키우는 일이다. 어지간한 기획은 GPT가 도와주고, 더 어지간한 일은 대부분 경험했기에 두렵거나 걱정되지도 않는다. 다만, 언제 어떻게 스타트를 할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달까. 이번엔 빨리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오래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만들게 될 패션 브랜드 관련 공부를 하며, 잔잔바리 기록도 해보려고 한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 나이가 되니 얼마 전 일들도 구한말 사건처럼 멀게 느껴진다. 사실 말이 공부지 한정적인 정보 서칭이거나 거창한 기록이 아닐거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빨리만 외치던 나에게 가끔씩 걸리는 안전 브레이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브랜드실록’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10년 전쯤 책을 읽다 좋아서 메모해 두었던 한 문장이 떠올라 찾아보았다.


"언젠가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속에 말없이 쌓아둔다. 언젠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사람은 오랫동안 구름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다사다난했던 지난 삶이 태양을 향해 달려간 이카루스였는지, 혹은 언젠가 번개 불을 켜기 위한 먹구름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과거에 무엇이었든, 앞으로 뭐가 되든 어디론가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간절히 바라는 지점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무모한 꿈을 다시 꿔보기로 한다. 꿈꾸는 일에는 빠름도 늦음도 없다. 다만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니까.


일단 시작하면, 못 먹어도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