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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A Jan 06. 2024

누운 배

소름 돋는 현실 고증 소설

남편이 소설을 추천했다. '사랑의 이해'를 쓴 작가의 글이라고 했다. 나는 '사랑의 이해'를 드라마로 접했는데 고구마 먹은 듯한 답답한 전개, 그럼에도 이해와 공감이 되었던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가 결국 결말까지 정주행 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지만 결론적으로는 2023년 읽었던 책 중 (사실 많이 읽지 못했지만) 원 탑이라 할 만하다. 매년 CEO 선정도서라고 몇 가지 경영, 경제서를 직원들에게 추천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 책은 CEO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도서다.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정말로 추천하는 일은 리스크가 엄청나게 높다. 대기업 혹은 오래된 기업, 성장할 만큼 성장했고 사실상 성장판이 닫혀 이제는 노쇠할 일만 남았지만 매년 "혁신"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며 허황된 미래를 그리 회사, 늘 그듯 뿌연 스케치만으로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채 일을 위한 일을 계획하는 것으로도 먹고 살만한 회사사람들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회사는 급속성장하는 신생기업의 모습이지만 사람들의 캐릭터는 오래된 조직을 구성하는 해묵은 사람들의 복사판이다.  미생에 몰입했던 직장인이라면 이 소설 역시 그에 부족함 없는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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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그럴싸한 자료들이 나왔다. 이전까지 막연하게 들리던 팀장의 지적이 실은 맞는 얘기였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일은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려줄 수는 없었다. 먼저 알아야 했고 알고 난 다음 기준을 세워 치고 나가야 했다.


어느 지위 이상 올라서면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이 되게 시키고, 시키는 대로 해오게 만들고 그걸 내 부서, 내 조직의 실적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해지는 거다. 원리 원칙이나 너 하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걸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생산량은 다시 추락했다.... 회사는 추가로 설비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회의는 늘 원만하고 단합하는 분위기로 끝났다. 다름 한주는 정말 최선을 다해 분투하자고 말들 했지만 그다음 주에도 생산량은 더 떨어졌고 그래도 회의는 늘 원만하고 단합하는 분위기로 끝났다. "혁신! 혁신! 혁신!" 공허한 구호 삼창도 여전했다.


우리가 손에 일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우리 목덜미를 틀어쥐고 있는데 어떻게 장담하고 책임지겠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는 거고 우리가 일을 휘어잡고 있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일을 반드시 시간 안에 해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인력, 자재, 장비, 설비 원인을 확실히 알아낸 뒤 그것을 담당 임원들에게 요청하고 또 내게 요청하세요.


"내가 생각하는 혁신이란 이렇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꾸는 것입니다." 황 사장은 자기 말을 따라오는지 살피듯 나를 봤다.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바꾸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수는 있어도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듯, 어떤 것을 바꾼다면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을 바꿀 수 있습니까? 흔히 미래를 혁신한다고 거창하게 말합니다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알 수도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떻습니까? 현재는 권투 선수가 올라선 링입니다. 공이 울리고 다시 공이 울리는 사이지요. 그 사이에 권투 선수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날아오는 주먹을 막고 피하고, 자기 주먹을 뻗고 또 맞아가면서 결코 드러눕지 않는 것, 그게 전붑니다. 글러브에서 면도칼이라도 꺼내 쥐지 않는 한 링 위에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는 인내하고 극복하고 개척해 나가는 과정이지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입니다. 이미 일어나고 지나간 것을 어떻게 바꾸는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테지만 나는 다르게 봅니다. 과거야말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겁니다. 링 위에서 똑바로 못 했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링에 오르기 전까지, 링 밑에서 똑바로 안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견디고 헤쳐나가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 되레 우리 발목을 잡고 억압하는 과거, 인습, 껍데기뿐인 규정과 규제, 타성, 그런 것들이야말로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를 돌파하는 데 도움 주는 것들, 전통, 통찰, 지혜라고 부르는 것, 아니 더 쉽게 말해서 지금도 쓸모 있는 것,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것,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옳고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 과거에 남겨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전망합니까? 현재에 근거해서? 현재를 어떻게 인식합니까? 지금 당장 저 작업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 무전기로? 이 전화기로?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조각나 있는 정보에 불과하고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지나간 것, 경험이라는 실로 꿰서 인식합니다. 과거에 비춰 미래를 보는 겁니다. 따라서 과거가 혼탁하면 미래도 혼탁하고 과거가 없다면 미래도 없습니다. "


하지만 신년 경영계획 회의 내내 보여준 회장의 태도는 지난해와 똑같았다. 회장은 회의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봤고 사람들이 자기 아래로 뻗어 내린 위계에 어떤 태도로 복종하는지, 그것만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100여 명이 들어찬 회의실에서 그 수많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자체의 핀연과 필요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와 이해관계, 보여주려는 복종과 입증하려는 충성에 따라 일어나는 있이었다.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넘기거나 지나치는 것, 오직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격노했고 벼랑 끝까지 문책했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고 태도와 양심의 문젭니다. 무능한 사람은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책임하고 무치한 사람은 도울 수 없다. 이것이 내 원칙이고 방침입니다.


권 부사장은 황 사장처럼 사람들을 몰아붙이지 않았고 궁지로 내몰리지 않은 사람들은 문제 속의 문제, 문제의 뿌리까지 꺼내 보이지 않았다. 문제의 뿌리를 캐내지 못했으므로 대안과 대책은 합의에 그쳤고 합의였기 때문에 책임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먹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사는 거 별거 아니데이. 지금이야 막막하고 답답하겠지만, 별별 생각 다 들겠지만 살아보면, 살고 보면 참 별거 아이라, 사는 거... 연연할 것 없는 거라. 지나고 나면 다 좋은 것만, 좋았던 것만 남는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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