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as art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근본적인 기술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 속에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 행위다.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의 삼분법에서, 진정한 의미의 '작업'은 단순한 생물학적 필요를 넘어서 세계에 지속적인 무언가를 남기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 자신이 작품과 긴밀하게 결속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중세의 장인이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도자기나 가구에 자신의 정체성을 새겨 넣었듯이, 노동은 원래 창조적 행위이자 자아실현의 통로였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주창한 예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모리스에게 노동과 예술의 경계는 모호했다. 그는 "모든 노동자는 장인이 될 수 있으며, 노동 그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라고 믿었다. 이는 노동이 단순히 임금을 위한 고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함과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와 기술 시스템은 이러한 노동의 본질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해체해 왔다. 분업, 세분화, 자동화로 대표되는 산업혁명 이후의 변화는 노동자를 창조적 주체에서 거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노동 과정 자체로부터, 동료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본질로부터 소외된 왔다.
나 역시 모델 개발자로서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데이터가 말하는 현상과 대면하는 진지한 연구자로서 오롯이 모델을 설계하고, 데이터와 씨름하며, 알고리즘의 논리를 구축하던 과거에는 내가 만든 것과 나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지적 창조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물은 나의 사유와 노력이 응축된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조직이 거대해지고, 업무가 세분화되며, 규제와 프로세스가 강화되면서, 나는 더 이상 나의 업무 과정을 '창조자'가 행하는 일에 포함시키기 어려워짐을 느낀다. 모델러가 과거보다 손쉽게 양산하는 모델은 거대 시스템 속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되며 예술이라기보다는 공산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서론: 잃어버린 '나'의 흔적
모니터 위로 수천 줄의 코드가 흐른다. 거대 모델의 파라미터를 튜닝하고,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최적화하는 이 행위는 분명 고도의 지적 노동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복잡한 시스템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나의 존재가 희미해짐을 느낀다. 과거 내가 짠 코드가 즉각적인 결과물로 돌아오던 시절, 화면 속의 결과물은 곧 '나'였고 그 결과는 나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기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인공지능 모델 속에서, 나의 노동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나는 창조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돌아가는 기계의 기름칠을 하는 관리자인가.
이 글은 한 모델 개발자가 느끼는 노동의 소외와 가치 상실에 대한 고백이자, 잃어버린 노동의 본질인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철학적 모색이다.
1. 노동의 원형: 사회와 관계 맺는 기술
본래 노동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생계를 위한 화폐 획득 수단만은 아니었다. 철학적 관점에서 노동은 '나의 행위를 통해 사회와 관계를 맺는 기술'이다. 도공이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 때, 그 그릇에는 도공의 손길과 의지, 즉 그의 '주체성'이 투영된다. 그 그릇이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때, 도공은 비로소 타인과, 그리고 사회와 연결된다.
이때 노동과 예술의 경계는 모호하다. 내가 만든 것과 나 사이에는 긴밀한 유대감이 존재한다. 나의 땀과 고민이 물성에 그대로 묻어나기에, 결과물을 보며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것이 노동이 가진 본연의 가치, 즉 '자기실현'과 '사회적 관계 형성'의 기능이었다.
2. 거대 기계(Megamachine)의 등장과 관계의 단절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인간 대체를 지향하는 기술 시스템은 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가 지적했듯, 현대 사회는 거대한 조직 자체가 하나의 기계처럼 작동하는 '거대 기계(Megamachine)'가 되었다. 이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효율성이다.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은 잘게 쪼개졌다.
모델 개발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데이터 전처리, 모델 아키텍처 설계, 하이퍼파라미터 튜닝, 인프라 관리 등으로 세분화된 공정 속에서, 개발자는 전체를 조망할 권리를 잃는다. 나는 모델의 아주 미세한 부분을 수정하지만, 그 수정이 최종 결과물인 인공지능의 대답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관계 설정'은 차단된다. 이 모델을 쓰는 사용자와의 관계 역시 과거처럼 긴밀하지 않다. 수많은 모델 중 하나를 나와 같은 사람들은 생산할 뿐이고,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모르는 사용자들은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만든 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추적이 불가능해지고 어느새 '나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이때 노동은 예술이기를 멈추고 단순한 기능 수행으로 전락한다.
3. 자율적 기술과 부속품이 된 개발자
더욱 절망적인 것은 시스템의 속성이다. 쟈크 엘륄(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The Technological Society》에서 '기술(La Technique)'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증식한다고 경고했다. 오늘날의 AI 시스템은 엘륄의 예언을 섬뜩하게 실현하고 있다.
우리가 만드는 모델은 스스로 학습한다(Self-learning). 개발자인 나조차 이 '블랙박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연산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제프리 힌튼의 고백처럼 우리는 더 이상 이 모델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하기에 인간의 인지를 넘어설 만큼 복잡해졌거나, 인간의 인지 방식 외의 사고를 하는 존재가 출현한 탓이다. 과거에는 내가 도구를 통제했다면, 이제는 시스템이 나에게 데이터 공급과 튜닝을 요구한다. 주객이 전도된 지 이미 오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내가 만든 결과물을 상품화하여 나와 분리시키고, 기술적 속성은 나의 지적 노동마저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밤새워 최적화한 알고리즘은 거대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부품으로 작동할 뿐, 나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사회에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극심한 가치 상실과 회의를 느낀다. 나는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가, 아니면 단절되고 있는가?
4. 나는 어떻게 나의 작품을 되찾을 것인가?
우리가 다시 노동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는 부속품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비록 거대 시스템 안에서 일할지라도, 나의 노동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질문하는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모델 개발자로서의 나는 이제 코드를 단순한 기능 구현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 놓인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내려 한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 즉 '왜(Why)'를 질문하고, 기술이 인간 소외를 가속화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서는 것. 그것이 분업화와 자동화의 파도 속에서 내가 나의 노동을 통해 다시금 세상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알고리즘이 어떤 모델을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 내가 지향하는 미래상이 개입되도록 하는 일이 내게 남아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는 모델, 공정성이 개선되는 모델, 그동안 소외받던 사람들에게 작은 기회라도 확장되는 그런 모델은 알고리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진 내가 유도할 수 있다.
나는 부속품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의 노동으로 세상과 대화하려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