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포트는 괜히 가져왔네

by 뀨얼랏

비행기 4시간 지연으로 인한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둘째 날의 여행 계획은 무의미해졌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겨우 숙소에 도착하여 잠에 든 탓이다. 하루가 홀랑 날아가 버린 셈이다.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여행의 기간이 꽤 길다는 것.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니, 성인의 여행과 비교할 수 없는 법이었다. 성인이 3박 4일이면 다 돌아볼 곳도, 아이와는 그 두 배의 기간을 잡아도 다 못 돌아볼 게 분명했다. 무리하게 끌고 다니다가는 탈이 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길게 잡은 일정이었다.


아이와의 여행은 무조건 호흡을 천천히 가져가야 한다. 게다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비행기 연착이라는 상황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7박 8일로 긴 여행 계획을 세운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블라인드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데도, 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아이가 깰까 조심스러워, 주린 배를 움켜쥐고 휴대폰을 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버티기 어려워졌다. 아들아 미안하다. 널 깨우는 한이 있더라도 아빠는 뭘 좀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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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배낭에서 컵 미역국밥과 휴대용 전기포트를 꺼냈다. 내가 가져온 전기포트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휴대용 전기포트다. 접어놓으면 아주 작은 크기여서 여행용으로 딱이었다. 다만 무게는 좀 있는 편이라 배낭에 넣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그래도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특별히 챙겨왔다. 왜 그런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호텔 전기포트는 여행 온 사람들이 참 다양하게 사용하는데, 그중 어떤 사람들은 속옷 빠는 용도로도 사용한다고.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찜찜하긴 했다.


나는 흐뭇한 시선으로 집에서 가져온 전기 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물은 잘 끓지 않는다. 대만은 110볼트를 사용하는데, 내가 가져온 전기포트가 220볼트라서다. 콘센트에 코드가 꽂히긴 했지만, 전압이 약해서 물이 서서히 끓었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물이 끓어올랐다. 컵 국밥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한번 돌리기 위해 로비로 나갔다. 로비에 나가자마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100도씨의 뜨거운 물을 이용할 수 있는 온수기가 있었다. 애초에 전기포트를 가져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맙소사... 전기포트는 괜히 가져왔네."


게다가 이다음 호텔은 무료 조식이 제공되는 곳이라, 전기포트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아주 허튼짓을 한 셈이었다. 땀이 삐질 났다. 나는 애써 이 상황을 합리화해보았다. '저 온수기의 물이 깨끗하지 않을 수도 있어'라고. 이건 마치 높은 가지에 열려 있는 포도를 보고, 여우가 '저 포도는 분명 신 포도일게 분명해'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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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근데 아이의 컨디션이 영 시원치가 않아 보인다. 일어날 힘이 없다며 축 늘어져 있었다. 그 고생을 하고 새벽에 늦게 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빠가 괜히 좀 저렴히 가보겠다고 늦은 시간 저가항공사 비행기를 끊어서 널 이렇게 고생시키는구나. 몇 푼 아껴보려 하다가 아이가 힘들어하는 상황이 된 것 같았다.


"아빠 나 배가 고픈데, 일어날 힘이 없어."


아이의 말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도 벌써 2시가 넘은 시간이라 밥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기운을 차릴 테니.


"그럼 원랜 안 되지만, 오늘만 누워서 먹을까?"

"알겠어."


미역국에 만 밥을 한 숟가락씩 떠서 아이를 먹여 주었다. 하얀 침대보에 묻을까 조심조심. 아이는 너무 맛있다며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밥은 금방 다 먹었다. 하지만 밥을 다 먹고도 속이 울렁거린다며 아이는 여전히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그래 됐다. 밥이라도 먹었으니 됐다. 이젠 기운을 좀 차리길 빌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나니 내가 좀이 쑤셨다. 좁은 호텔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게 참 고역이었다. 대만에 온 첫날은 좀 여유 있게 시작하겠다 생각은 했었지만, 오후 4시가 되어서까지 숙소에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외출 의사를 물어보았지만,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 그른 것 같았다. 무리하게 아이에게 나가자고 더 권유를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포기하면 얻는 것인가. 간식을 사러 호텔 앞 편의점에 잠깐 다녀온 사이에, 아이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아이는 내가 나간 사이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고 했다. 그러자 속 울렁거리는 게 없어졌다고 했다. 외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휴 다행이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아이와 함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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