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in Jun 14. 2020

포스트 코로나 19

패러다임의 전환

최근 비교적 맑은 봄날의 공기를 느낀다.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며 어릴 때부터 보아오며 갖고 있던 습관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미세먼지와 황사로 일기예보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또 이렇게 다시 맑은 바람을 느껴본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이지만 인간의 활동을 제한하면서부터다. 중국 산업화와 연동된 미세먼지가 그 짧은 기간에 줄어든 것도 신기하지만 올해는 황사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의아하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일상의 잠시 멈춤은 우리 지구 생태계에도 휴식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사회생활에서도 반강제적으로 찾아온 고요함. 평온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누구에게나 양해가 되는 상황이니 그동안 바삐 달려오기만 했던 삶 속에서 숨 고르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야 할까? 번거로우면서도 의무적인 걸음보다는 마음을 담은 안부를 전하는 방식으로의 회귀. 물리적 시간에 쫓겨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 연락을 할 때나 선물을 고를 때도 다시 한번 그 상대에 대해 더 생각해볼 여유가 생긴다.


4월 말 완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보도가 나오자마자 서울시 도로 위 교통정체는 다시 시작되었다. 뉴스를 직접 보지 않고도 주요 도로 사정만 보고도 우리 사회 위기의식변화를 가늠한다. 모든 것들을 빠르게 인식하고 그에 발맞춰 신속히 조치하고 대응하는 한국인들의 실천력과 그 행동의 바탕. 개별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이나 공감대가 형성된 공공의 사안에 관해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제되고 있음에 감탄한다.


코로나 19로 우리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럼에도 일하는 부모의 아이들은 여전히 볼모가 된다. 부모는 돌봄에 전전긍긍하며 선택의 기로에서 또 모성과 죄의식을 자극받는다. 결국 대안 찾기의 노력 부족에 대한 비난이나 패자의 피해의식을 피하거나 숨기기 위해 가장 만만하게 용인되는 이유를 들어 본심을 감춘다. 근근이 버티어 내고 있는 소위 ‘독한 존재’를 제물 삼고 희생자로 만들어 낸다. 향후 이들의 독박 육아에 따른 불평등, 책임 등의 심리적 문제, 가정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등 케어는 차치하고라도 경력단절 문제, 이들을 위한 지원, 돌봄의 문제는 미해결 과제로 남겨진다.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돌아가고 있음을 보며 재택근무 혹은 탄력 근무제 도입이 이미 가능한 경제 시스템이었음에도 그동안 선택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회사 내 잉여인력이었던가 그런 의구심이 든다. 아마 이 사태중 혹은 이후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한동안 소유하기보다는 공유하는 경제가 트렌드라며 선도했던 소비문화가 코로나 19를 계기로 언택트의 원격 경제에 익숙해졌다. 어쩌면 인프라와 기술의 문제를 넘어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감대가 전제되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의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통해 협력이익공유를 실현한 예라고 볼 수도 있겠다. 민간이 사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면 이들 데이터를 활용한 정보공해에 시달린 개인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효율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던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은, 자국이 안보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누구도 온전히 안전하지 못함도 확인한다. 사익에 편승한 요설과 막연한 낙관론에 근거한 이상주의는 생존을 위한 봉쇄에 무력하다. 경제의 논리가 아닌, 최소한 국가존립을 위해 의식주를 포함한 국가기반사업에서 생산업의 재편 및 보호무역주의의 재고는 필연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Rese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