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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n Jun 23. 2024

다른 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거나 생각해본다는 의미, 공감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경험했던 것은 오롯이 전부 엄마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비트와 울림, 파장으로 일괄된다. 곧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모든 것이 낯설어 불안하고 두렵다. 유일한 익숙함, 잦은 눈맞춤, 이따금씩 배고픔이나 용변의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 말을 걸고, 표정을 짓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내오고 반응한다. 보내오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니 상대는 더 큰 반응을 보내오고, 단어들도 말한다. 아마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서의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인가보다. 울음을 우니 이유를 묻고 불편한 곳을 찾는다.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니 웃었다며 좋아한다. 그렇게 호-불호의 과정을 주고받고, 쾌-불쾌의 감정들이 점차 분화되면서 감정과 경험이 축적되고, 한 아이는 그 사회의 문화 속에서 사회화된다.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감정과 언어가 사회화된 산물임이 밝혀지고, 인간이라는 종족의 속성과 사회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우리네 삶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각자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 있다. 독립된 하나의 세계라는 말인데, 비유처럼 들릴 뿐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타인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인간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감정이나 언행의 정도를 가늠하며,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해 간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고 경험한 바를 정확히 상대와 나눌 수는 없다. 그저 내 경험에 비추어 짐작하고 상상할 뿐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오차범위를 좁히는 과정이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이 내가 과거 느꼈던 감정과 같지는 않을지 맥락에 맞게 추론하며 상대를 살피며 교정해간다. 인간의 얼굴에는 털이 없다. 서로의 표정을 읽어 상대의 마음이나 의사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언어를 포함한 커뮤니케이션 역시 서로의 정보를 교류하며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다. 그런 노력의 과정을 통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인 인간은 서로와 협력하고 연대하여 생존한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개인은 그야말로 외딴 우주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 역시 내가 어떤 정동(affect)나 느낌(feeling)을 축적했는지 알지 못하니 맥락을 파악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가 어느 위치에 서서 감각되는 사건인지, 느끼는 감정인지 이해하지 못하니 공감할 수도 없다. 서로를 파악하지 못해 불안이 증가하니 신뢰할 수도 없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쁘지는 않은데, 눈치가 좀 없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경우는 두 가지다. 충분히 사회화되지 않아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사회적으로 객관화되는 과정을 통해 사회기준을 내면화 하는 과정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 미성숙하거나, 상대와의 상호작용을 무시한 채 이기적인 입장만을 고집하는 경우다. 게다가 본인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일정 이상의 사회적 관용도 기대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일말의 미안함이나 양해도 없이 언행한다면 그건 폭력과 강요를 일삼는 안하무인의 몰염치이자 사회공동체를 깨는 위험한 자다. 심지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이 미칠 결과는? 표현이 투박하거나, 개성이나 주관이 뚜렷해 고집이 센 것과는 다른 문제다. 공감능력이 아주 많이 부족한, 모자란 사람이다.


하나의 우주인 한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웃한 각각의 우주와 차이를 알고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협의하는 정치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를 구성해 생존해온 존재다. 그 어느 우주도 사소할 수 없으며, 더구나 나를 공감하지도 못하는 어느 일방의 도구가 되어 “필요할 때 군말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여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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