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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군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 않고 '하드보일드 소설'을 뽑겠다.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같은 정통 하드보일드 소설보다는 사실 일본식 하드보일드 소설(추리소설로 대표되는)에 더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말이다. 언제나 장르에 대한 정의가 그렇듯이 어떤 소설이 정통의 선에서 비껴갔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애매하고 어려운 일이다. 여하튼간 내가 생각하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정의는 기본적으로 1. 범죄를 다룰 것 2. 냉혹한 사회 비판이 포함될 것 3. 문체가 간결할 것 정도이다. 이러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사람들은 종종 '필름 누아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누아르(Noir)는 프랑스어로 '검다'라는 뜻으로 역시 그 정의 또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나 역시도 하드보일드와 필름 누아르가 서로 일맥상통하는 장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내가 생각하는 필름 누아르란 1. 범죄를 다루고 2. 음산한 분위기를 지니며 3. 등장인물의 감정을 호소하지 않는(즉 표현이 간결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중배상 Double Indemnity>은 '필름 누아르'로 구분되는 대표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제임스 케인이라는 하드보일드 작가의 소설이며 시나리오 작업을 레이먼드 챈들러가 담당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내용적 측면에서 영화가 범죄의 사실적 전달에만 치중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누구든 이 영화가 '누아르'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범인을 찾는 영화가 아니다. 범죄의 진상을 파헤치고 단서를 모아 범인에 대한 퍼즐을 맞추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주 초반에 범인은 이미 드러난다. 범인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된다. 왜 죽였을까?와 더불어 왜 이 남자, 네프는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해결할 때까지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엉덩이를 뗄 수 없다. 영화는 총상을 입은 남자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녹음기에 대고 자신의 범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현재와 과거의 장면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즉 사건을 탐구하는 추적자의 시점이 아닌 범죄를 저지른 자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공범인 필리스의 관점마저 배제한 채 철저하게 네프의 시점에서만 전개되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관객은 추적자가 어느 정도로 사건을 파악했는지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상황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1인칭 관점의 전개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서스펜스를 느끼게 한다. 서스펜스란 불안하고 긴장되는 상황을 보고 관객이 느끼는 조바심 등의 감정을 일컫는다. 네프의 범죄를 추적하는 인물은 네프의 직장 동료인 키즈이다. 그는 유능한 보험 심사관으로 네프가 범죄를 고백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서스펜스가 고조되는 장면이란 이런 것이다. 네프의 집에 전화가 울린다. 공범인 필리스가 곧 방으로 올라가겠다는 전화다. 네프는 그러라고 한다. 뒤이어 갑작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벌써? 네프가 문을 열자 앞에 서 있는 건 키즈이다. 곧 필리스가 올라올 것이다. 필리스와 네프가 서로 긴밀한 관계라는 것을 예리한 보험 심사관인 키즈가 알게 된다면 네프의 범죄 행각 또한 금방 밝혀질 것이 뻔하다. 관객과 네프는 손바닥에 쫘악, 땀이 차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도 필리스는 문 밖에서 키즈의 목소리를 듣고 문 뒤에 숨는다. 곧 키즈가 네프의 방에서 나온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키즈는 갑자기 몸을 돌려 필리스가 숨은 문 쪽을 본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 네프 또한 필리스가 문 뒤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 관객은 다시 한번 네프와 운명공동체가 되어 뒷골에 소름이 쫘악 끼친다. 이 장면은 서스펜스의 정의를 설명할 때 예시로 제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서스펜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네프의 1인칭 시점을 따라가고 있지만 네프가 필리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 정말 필리스를 향한 연정을 이유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네프의 감정조차도 그러니 당연히 키즈나 필리스, 혹은 필리스의 현 남편이자 살해당한 인물인 디트릭슨, 디트릭슨의 딸인 롤라에게 공감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등장인물 간의 감정은 그저 '스토리의 전개상 필요한 만큼'만 드러난다. 또한 드러난 감정은 모두 논리적으로 설명된다. 롤라가 필리스에게 느끼는 적대감은 나중에 필리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감독은 어떤 인물에게도 관객이 '연민'과 같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감정을 가질 수 없도록 하고, 사건의 전개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참 기술적(記述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종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굳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교훈을 뽑자면 '여자를 조심하자.'나 '보험 사기는 치지 말자.' 정도랄까. 그래서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수습하기 위한 시간이 딱히 필요 없다. 아주 깔끔한 맛이다. 인물들의 감정이 이렇듯 절제되어 제시되다 보니, 관객들은 화면에 보인 만큼만 인물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 후반부 필리스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부분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위에는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레이먼드 챈들러만 언급했으나, 이 영화의 감독인 빌리 와일더 또한 나에게 익숙하다. 그전에 뜬금없는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마릴린 먼로의 빅 팬이다. 그녀의 필름은 물론이고, 그녀가 지녔던 할리우드에서의 위상, 그녀의 외모, 스타일, 비극적인 인생사까지 모두 선망한다. 이러한 감정이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20대에 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내가 마릴린 먼로의 환생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정도로 그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빌리 와일더는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과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에서 먼로와 함께 작업한 감독으로 물론 나는 두 작품을 모두 보았다. <이중배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는 작품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빌리 와일더는 그야말로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러면서도 할리우드의 일률적 시스템에 끊임없이 반항했던 감독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여하튼간 나는 그 시대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여전히 두근거리고 좋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미 있는 무언가의 모방이나 오마주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였던, 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부럽다. 그래서 오색찬란한 불꽃이 터지는 요즘 영화에 열광하다가도 결국 흑백 영화로 돌아가게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