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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상한 주유소에 갑니다

That's all.

by autumn dew

늦잠을 자본게 언제인지. 이젠 예전처럼 늦게까지 누워있지 못한다. 어떨 땐 출근할 때보다 눈이 더 일찍 떠지기도 하는데 주말인 게 아깝다는 생각에 억지로 더 누워있기도 한다. 예전에는 버티듯 누워 핸드폰을 보다가 다시 잠들기도 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쉽지 않다. 허리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커튼과 창을 열어 빨리 이 방을 환기시키고 싶다.


다음 주부터 다시금 전국투어 급의 출장이 예정되어 있고, 이번 주말만큼은 어떻게든 쉬어보겠다고 했는데. 이미 할머니처럼 돼버린 수면패턴으로 인해 늦잠은 일찌감치 실패했다. 그렇다고 귀한 3일간의 연휴를 아무런 일정 없이 집에만 있을 순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일찌감치 영화를 예매해 뒀다. 그러다 당일, 영화관에 나서기 전에 별안간 천둥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소나기가 내렸다. 취소를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취소 가능시간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는데 다행히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역시 기다리다 보면 절로 지나가는 일들이 있다. 기분 좋게 영화를 보고 돌아왔고, 나에겐 그 영화가 무더운 날의 소나기 같았다.



사회초년생 시절, 출근하기 싫다고 징징대던 나에게 어느 선배가 말했다. 삼시세끼 밥 먹는다 생각하고 출근하라고. 때가 되어 밥을 먹고 또 조금 지나면 다음 끼니때가 찾아오듯, 직장생활을 거창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단순한 일과처럼 여기라고. 그때에 난 또 반문했지. 밥은 먹기 싫은 반찬은 골라내서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출근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하고. 그런 선배들이 해준 조언이야말로 몸에 좋으니까 먹어 둬, 하던 어린 시절의 먹기 싫은 반찬 같았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걸 찾아 먹어보겠다고, 당시엔 색다른 조언을 찾아 여러 책들을 열심히 사 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책들 중 내용이 떠오르는 것들은 고작 한 두 권뿐이다.


이제는 안다. 골라내고 싶었던 그 맛없는 반찬들이야 말로 더 영양가가 좋았다는 것을. 그리고 나이가 들면 그런 음식을 골라내는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먹기도 한다는 것을. 깻잎을 애정하고 미나리는 싫어했지만, 미나리와 먹어야 더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둘 다 좋아한다. 이건 누가 알려줘서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 절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함부로 후배들에게 훈수를 두지 않는다. 어차피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좀 미안하지만 이곳에서 좀 늙어보면 절로 알게 될지 모른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 수 있었더라면-과 같은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쌓여간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렇게나 많은 책과 미디어에서 미리 알려주는 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뒤늦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체득하여 얻지 않은 것들은 역시나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려나.




얼마 전, 사회초년생 시절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책 중 하나를 누군가에게 선물했다. 새 책을 선물하면서 오랜만에 내 책을 꺼내보니 내 책엔 인덱스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공감되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다음에 편하게 찾아보려고 붙여서 그런지 책 가장자리가 너저분했다. 꺼낸 김에, 갈피들을 하나씩 펼쳐 읽어보았다. 그때엔 가슴 깊이 와닿았던 것들 중 일부는 생각보단 예전만큼의 감동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것이 이 글귀들을 체득하였다는 반증처럼 여겨져 다행이었다.



출근은 마치 근처에 하나뿐인 주유소에 매일 기름을 넣으러 가는 것만 같다. 이 이상한 주유소는 하루치의 기름만 넣을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기름을 다 넣고 떠날 때가 돼서야 그 가격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얻어온 것도 하루치뿐이라, 내일도 어쩔 수 없이 이 주유소에 가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날은 같은 금액으로 더 많이 얻고, 어떤 날은 조금밖에 얻지 못한다. 그렇게 매일 불가항력으로 이곳에서 하루치의 기름을 넣어야만 한다. 나의 수고로움을 예상하고 매일 그만큼만 수고하지 않듯이, 매일 예상하는 것과 얻어가는 것의 에너지의 양도 같을 수 없다. 이 가격형성이란 내 통제 밖의 일인 것이다.




연휴의 끝. 방을 청소하며, 연휴기간 중 보고 온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의 OST 'That's all'을 들었다. 다음 주엔 얼마의 기름과 얼마의 연비를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맛없는 반찬이 올라와 있더라도 기꺼이 젓가락을 가져다 댈 수 있을 정도의 배짱은 생긴 것 같으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늦잠은 좀 못 자도 충분히 쉬었다.


그러니, That's all.

어쩜. 노래 덕분에 연휴의 마무리가, 또 다른 한주의 시작이 그럴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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