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얘기면 충분해요
회사에서 종종 유명 강사들을 불러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얼마 전에는 예능에도 곧잘 나오는 꽤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초빙해 '스트레스'라는 주제로 강연 및 소통 시간을 진행했다. 신청자에 한해 현장에서 들을 수도 있고, 실시간 생중계를 통해 자기 자리나 회의실에서도 시청할 수 있게 해 줘서 우리 팀 사람들은 팀 회의 끝에 다 같이 모여서 회의실에서 시청했다(우리 팀장님은 이런 게 있으면 꼭 회의실에서 다 같이 보고 싶어 한다).
개인적으로 심리학이나 뇌과학, 정신과에 유독 관심이 많아서 꽤 재미있게 들었는데, 마지막 순서였던 Q&A 시간에 나왔던 한 질문에 대한 답이 인상 깊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Q: 팀에서 저는 청일점이고 나머지 네 명이 여자입니다. 여성분들끼리는 소소하게 수다도 많이 떨고 잘 어울려 다니는데 팀에서 혼자만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날씨 얘기나 점심 메뉴 말고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팀원들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제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A: 회사는 돈 벌러 오는 곳입니다. 동아리나 동호회 활동이 아니죠. 날씨 얘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회사에서 굳이 애써가며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업무만 잘할 수 있으면 돼요.
어떻게 보면 사실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머릿속에 탁, 하고 전구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회사 생활 11년 차, 워크숍이나 간담회를 진행할 때마다 예외 없이 나오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이다. 신입사원 교육 때 실무 교육을 하시던 어떤 부장님의 PPT가 아직도 기억난다. 피피티 한 페이지에 크게 소(牛)와 드럼통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퀴즈를 하나 내셨는데(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답이 '소통'이었다. 너무나 아재다운 개그에 신입 사원들은 주제도 망각한 채 웃지도 못하고 썰렁하게 교육이 끝나고 말았다.
직장에서 소통은 중요하다. 꼰대 같은 발언인가? 하지만 회사에서 나의 본분인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면 소통은 필수이다. 내가 소위 '사'자가 붙는 의사, 변호사 등이 아니라면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의 협업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물론 의사, 변호사도 협업이 필요하지만).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가 간다. 내가 진행한 업무를 기반으로 그다음 업무를 다른 사람이 진행하는 경우, 그리고 그 반대인 경우도 많고, 동시에 같은 일을 여러 사람이 하기도 한다. 그러니 서로의 업무 진행 상황에 대한 소통은 필수이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소통이 필수라고 해서 업무 외적인 소통까지 필수인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회사에서의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편이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 하고(그럴 수 있을 거라 믿고), 누구 좋으라고 하는지 모를 회식을 하며 좀 더 친해졌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친해지자면서 가지는 술자리에서는 술을 마실 때만 친한 사이가 되고 95% 정도는 다음날이 되면 고무줄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회식 자리에서는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는 얘기도 꼭 나오는데, 실제로 그 자리가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상사에게도 업무보다 술로, 또는 골프로 어필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전략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생각이 바뀌었다. 예전 남편 부서에서 상사와 매번 골프를 치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가끔은 평일에도 반차를 쓰고 상사와 골프를 치러 다닌다고 해서 혹시나 그 사람이 일만 열심히 하는 남편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까 싶어 남편에게 골프를 배우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골프가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부서 감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날아간 것은 남편이 아니라 그쪽이었다. 우리는 안도했지만 나는 그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 직장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지 1년 4개월이 되었고, 팀에서 홍일점이다. 홍일점이라고 무언가 다른 취급을 받는 것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팀장님을 포함하여 6명 중 나 혼자 성별이 다르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공대를 나와서 쭉 남초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나 혼자 여자라고 해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고, 저 Q&A 질문을 듣기 전에는 심지어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남자들)끼리 편의점에 가거나 그들만의 수다를 떨 때, 혹은 우르르 몰려 담배를 피우러 갈 때는 조금 불편한 기분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소외감을 느끼거나 외로움을 느낀다기보다도, 나는 경력직인데 잘 적응하려면 저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내가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저들끼리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은데 그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왠지 모를 의무감이나 조바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대답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며 새로운 회사생활 모토가 생겼다.
회사에서는 날씨 얘기면 충분하다.
Q&A 시간에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며 강사가 얘기하길, 본인의 학창 시절에도 대학원 동기들 중 9명이 여자고 본인만 남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들(여자들)끼리도 네일이나 연애 얘기 같은 별 시답지 않은 얘기만 하더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니 전전긍긍할 필요 없다고. 나도 이직하기 전에 팀 동기들과 오늘 저녁메뉴며 집에 새로 산 화분 이야기까지 아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직하고 나니 1년에 한 번도 연락이 어렵다. 참 아이러니하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특히 나 같은 내향형 인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도 어려운데, 하물며 내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어찌나 더 어려운지. 회사에서 그들 사이에 내가 굳이 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그럴 시간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나 더 챙기는 게 낫다는 이야기다. 날씨나 점심 메뉴 이야기를 나눌 정도면 충분히 관계가 좋은 것이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 인생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마음 쓰지 말아야지, 오늘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