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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르 Aug 16. 2023

백수, 대학동기의 결혼식 가다.

2020년 10월


오랜만에 대학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학교를 다닐 때 꽤 친했던 애였다. 이런저런 교내 프로그램도 같이 하고, 수업도 같이 들었다. 축구를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부르던 그 녀석은 타고나길 성격이 다정했다. 선후배 챙기기를 잘했고, 동기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취업준비로 소원해진 이후로 3년 정도 얼굴을 못 봤었다. 그런데 늦은 저녁,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그 아이였다. 반가운 마음에 화들짝 놀라 답장을 하려고 대화방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연락한다. 잘 지내지?

-(이러쿵 저러쿵)

-나, 다은이랑 결혼해.     


다은이는 그의 오랜 연인으로, 나도 잘 알고 있던 후배였다. 예쁜 눈웃음에, 살갑고, 다정한 성격의 그녀를 좋아했다. 그 둘이 결혼한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하고는 결혼식에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내가 지독한 백수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뭔가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서 나이만 먹어버린 백수. 연락이 끝난 뒤, 그 아이가 나를 잊지 않고 결혼식에 초대했다는 사실에 고마웠다가, 결혼식에 입고 갈 만한 옷도 없다는 사실에 곧바로 난처해졌다. 게다가 이미 번듯한 직장을 잡아 취직한 동기들 사이에 끼는 것도 멋쩍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공사, 대기업, 공무원이 되었다는 동기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나를 빈수레라며 놀려대던 녀석. 그 녀석은 몇 년 전에 이미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지금은 얼마나 으스댈지 상상만으로도 기가 쪽 빨렸다. 정말 오랜만에 그 녀석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깊은 고뇌에 빠져다. 그 녀석에게 얕잡히기 싫기도 했고, 그런 자리에 껴서 괜히 주눅 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백수인 주제에 자존심도 셌던 것이다. 물론, 백수라고 자존심도 없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결혼식을 가는 나를 상상해 보자.     


1. 있는 돈을 긁어모아 축의금을 만든다.

2.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 제일 그럴듯한 옷을 골라 입는다.

3. 축의금을 내고 식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4. 누구는 반가워하고 누구는 어색해한다.

5. 뷔페식을 먹으며, 근황을 주고받는다.

6. 누군가 '요새 뭐 하고 지내?'라고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한다.

.

.

(뭐라고하지)

.

.    

7. 나는 백수로 지내고 있어...(아니.. 별로 좋지 않다.)

7. 응, 나는 그냥 뭐, 너는 뭐 하고 지내?(최악의 화제 돌리기...)

7. 응, 나 취업 준비하고 있어.(정답)     


한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다. 보통의 경우, 나만큼 이런 상황을 힘들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래서 내가 이런 시나리오를 짜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속상했고, 어떤 대답을 하든 곤란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할 상대방의 마음이 지레 짐작되어 끔찍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이내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미안, 나 독감에 걸려서 결혼식에 못 갈 것 같아...     


아무래도 이게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래, 아프다고 하자. 그 당일날 내 컨디션에 따라 난 얼마든지 아픈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까지 아무 데나 취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결혼식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까.

웃프게도(?) 자꾸만 우스운 해결책이 떠올랐다.     


하지만 친구의 결혼식 당일,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고, 아무 데나 취업을 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의 난처함 때문에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결혼식을 놓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옷장 앞에 섰다. 언니가 입다 만 옷들 중에 가장 그럴듯한 옷을 골랐다. 코트 안에 짧은 여름 원피스를 입고, 분홍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서는 집을 나섰다. 가을 볕이 제법 따뜻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식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졸업 후 처음 보는 얼굴들에서 전에 없던 광채가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동안 열심히 산 사람들의 태가 나는 듯했다. 한편, 나를 빈수레라 놀려댔던 녀석은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과 말투.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른 동기들은 그 아이가 사회생활하며 둥글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변했고, 내 예상은 틀렸다. 내가 두려워했던 그 아이의 날카로움도 결국 과거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탈하게 퀘스트를 깨고(?)  결혼식장에서 만난 여자동기들과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한 친구는 남자친구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슬며시 알려왔다. 그리고선 손에 낀 불가리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두꺼운 금반지가 친구의 손에서 번쩍거렸다. 그 후로 명품, 재테크 이야기, 아파트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고 있는 그들의 앞길에 놓인 문제들이 더는 '진로'나 '꿈' 같은 것이 아닌 건 꽤 당연했다. 마지막엔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하며 큭큭대며 웃다가 헤어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즐거워서, 어쩐지 허탈해졌다. 그래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가 보다, 했다. 해야 할 일을 하겠다며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아무 걱정 없었다는 듯 웃고 떠들다가 조용히 허탈해지는 사람.


집에 돌아와 겨우 차려입은 옷들을 벗어놓고, 책상 앞에 앉자, 어딘가 맥없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후에 봤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동기의 빛나던 명품 반지, 그 앞에서 자기는 이것밖에 없다며 하소연하듯 꺼내놓던 명품백, 잘 차려입은 옷과 액세서리들.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놓인 건 책뿐인 책상 앞에서, 노래 가사에나 한줄 적혀있을 법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그날 처음, 20살 신입생이던 때로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환학생, 동아리, 대외활동, 영어 점수, 공시 준비 그간의 노력들이 재물로는 조금도 치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버버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엉덩이 붙이고 있던 시간은 (주관적으로) 분명 의미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불가리반지나, 명품백 같은 물질적인 대가가 내게 남아있을 수 없는 사태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고작 3년이라는 시간동안 나의 좌표가 다른 이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버렸다는 걸 깨달았고, 그들이 이런 사실을 제발 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부글부글 터져올랐다. 엄마도, 언니도, 동생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그러니 기필코 내 좌표도 새로 찍혀야 한다.

그게 내 자리든, 아니든 상관없다.

일단 한 번은 새로 찍혀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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