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mini flowers❀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1월 22일에 레단에 나간 이후로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구구절절 말하기가 이젠 뻔하고...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5주 동안 상담을 받았다. 세 가지 검사를 받고 5회 간 심리 상담사 선생님과의 만남을 가졌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작년부터 상담을 한 번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번잡스러운 현실의 일들로 미루다가 드디어 연락을 드렸고, 시작했다.
그 타이밍에 속 시끄러웠던 일이 하나 있었던지라, 그 일로 상담의 문을 열었다. 분노 표출에 대한 일이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자주 화가 난다. 정말 자질구레한 일들로 큰 화가 나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었던 적도 종종 있었다. 약간 다혈질도 있어서 엣취! 기침을 참을 수 없듯 화를 벌컥 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때 속 시끄러웠던 일은 내가 현지인 팀장님에게 쏘아붙였던 일이었다.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판단을 한 팀장님 덕분에 내가 새벽부터 고생을 한 일이 있었는데, 팀장님에게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화내지 말고 ~이렇게 잘 말해야겠다.' 열심히 생각해 놓고서 얼굴을 보자마자 감정적으로 쾅! 하고 박아버렸다. 그러고 나니 내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고 쓰레기 같아 보이던지... 자책의 늪에 빠져 한 참을 허우적댔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대인관계 안에서 자책적 사고가 잦고 자존감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인 '자기 조절감'이 낮다고 하셨다. 왜 내가 그렇게 화가 나고, 조절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자책하며 우울에 빠지는지 내 안의 핵심신념과 자동화 사고에 대한 탐색을 해보자고 하셨다. 첫날은 나에 대해 내가 지금껏 연구하고 파악한 사항을 열심히 전달했고, 상담 선생님은 마치 다른 곳에서 상담받던 사람을 연계해서 받은 것 같다고 하셨다. 그만큼 집약적으로 나를 잘 전달하는데 애썼던 첫 회기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게 검사지에 나오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일단 나는 자기 분석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너무 과하다고. 나에 대해 너무 분석하다 보니 우울하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타고나기에 예민한 사람이라 했다. 이 것이 내 분노의 50% 정도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그냥 내가 '인성이 나빠서'로 자책했던 일들을 돌아보니 나는 너무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작은 소리나 냄새, 빛 등에 예민하다. 소위말해 거슬리는 게 많은 사람이다. ㅋㅋㅋ 그러다 보니 반복적으로 작은 소리를 내는 누군가가 계속 신경이 쓰이고 큰 소리는 더더욱 날 힘들게 하고, 어딘가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냄새의 원인을 찾는데 바쁘다. 어느 정도냐면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한 소리, 냄새 등 때문에 명치가 답답하고 몸이 긴장되어 굳어 버리기도 한다.
오감이 예민하면 괴롭다. 그 괴로움을 다스리는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러다 보면 감정증폭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순간 드는 그 불편한 감정(화, 짜증 등)에 압도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가 살짝 건드리면 안에 가득 찼던 압력에 빵 터져버리면서 벌컥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그렇게 내 성대로 살 수 없으니 계속해서 그 예민함을 통제한다. 나의 기분, 예민함을 통제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면서 우울함이 커진다고 했다. 내 우울 수치는 꽤 유의미했다. 우울증 환자의 기분이 50이고 보통 사람이 100이라면 나는 6-70 정도라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지금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가?'라고 할 거다. 나는 우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오랜 탐색과 노력이 있었다. 나는 늘 내가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 같다고 느껴졌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버거운지. 그냥 죽고 싶고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첫 말인 '인생은 고해다'에서 눈물을 주륵 흘리며 공감했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사실 그렇다. 이런 우울함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원인을 찾으려 애쓰던 과정에서 경미한 공황장애도 왔었다. 참고 참다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죽을 것 같아 강의실을 뛰쳐나왔을 때 이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심장의 문제인 줄 알고 심장병원도 가봤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심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롯한 나의 정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슬펐다. 차라리 몸의 문제면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술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매일매일 혼자 술을 마셨었다. 하지만 술은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한 번은 혼자 잔뜩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 싶었다. 나는 왜 이러고 살고 있나, 왜 내 기분에 함몰되어서 그걸 마비시키는 이런 값싼 방법으로 나를 망치고 있나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술을 안 마셨다. 대신 나가 놀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활동들을 찾아다니며 내 기분을 계속해서 환기시켰다. 지금도 나는 기회만 있으면 나가서 뭔가를 한다.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밖으로 돌리는 것이다.
우울한 사람은 불안이 높고 불안이 높은 사람이 우울이 높다고 했다. 맞다 맞아. 나 내 말이다. 다들 그 정도 우울함과 불안함 속에서 잘 살아가는 거겠지 생각하며 나의 나약한 정신력을 탓하며 살아왔는데 심리 상담사가 '인생 난이도가 꽤 높으세요!'라고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온갖 내적 고통들을 인정해 주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내가 사는 게 힘든 것이 나의 나약함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내가 이상한 애여서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나는 힘들만했어! 하는 나에 대한 나의 포용이 시작되었다.
상담가로서 내 검사지를 볼 때 가슴 아팠다고 했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누르고 있는 셈이라고. 무기력한데 하고 싶고 우울한데 명랑하고 불안한데 도전하고 싶어 하는 나의 강한 양면성이 나를 과열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맞다. 나는 MBTI 같은 검사도 거의 중간이 나온다. 이게 통합이 잘 되어서 중간이 아니라, 두 가지 욕구가 모두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저게 불만족스럽고 저렇게 하면 이게 불만족스러운,.. 그런 아주 탐욕스러운 중간 인생이다.
이 외에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말은 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할까 싶었던 것들을 명료한 단어로 끄집어내어 정리를 해주셨다. 심리 검사를 한들 뭐 얼마나 파악이 되겠어,... 했었는데 꽤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을 한 후 나는 좀 더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몰아붙이기만 했던 나를 조금은 느슨하게 봐주고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그런 상황이 힘들었고 화가 났구나, 이만하면 잘 참았다!'와 같이 여겨주기로 했다. 나는 꼴에 자기 기준도 매우 높은 사람이라 내가 뭘 그리 노력하고 대단하다고,...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는데, 상담가 선생님은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고 수용해 줄 수 없다면 전문가가 인정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했다. 일단 나에 대한 수용이 있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인성이 쓰레기라, 구제불능의 못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좀 더 예민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일 뿐! 하고 가볍게 털어버리고 수용할 수 있어야 그다음인 '조절'이 가능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세 번째 회기 때에는 나의 핵심신념과 자동화 사고에 대한 좀 더 깊은 탐색을 했다. 나의 기본 불안과 원가정에서의 역동을 돌아보았다. 젊었던 부모님의 잦은 다툼, 신경전, 그들의 미성숙함과 예민함, 그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내게 생긴 자동화 사고를 정리했다. 자동화 사고란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도 쉽게 의식되지 않는 사고를 말한다. 말 그대로 자동적으로 드는 생각이다.
사실 그간의 내 집요한 탐색으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쌓였던 것들은 현재 많이 풀어졌다. 성인대 성인으로 그리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대 인간으로 잘 풀고 극복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들은 결국 내가 떠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의 극단적인 건강염려도 다루었다. 이 것은 내 타고난 기질(불안)과 자동화 사고의 합작품이었는데, 몇 가지 나의 극단적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난 뒤 더 심각해졌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내 안에 어떤 병이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이 내게 현실적으로 있다. 상담가 선생님은 내게 신앙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여러 길로 두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신앙으로 버티며 극복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안전하다 느꼈던 적이 없다. 늘 벼랑 끝에 내몰린 나를 구원했던 것은 절대적인 존재, 하나님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핵심신념은 '나는 인성이 별로야' 그리고 '나는 나약한 사람이야'였다. 별것 아닌 것에 크게 화가 나고 극단적으로 나오는 나를 돌아보며 자책하고 나는 역시 별로인 사람이야, 구제불능이야 라고 여기는 것. 그리고 큰 외부적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 늘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내가 남들보다 정신이 나약해서 그런가 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 없이 '나는 이러해야 해'라는 높은 자기 기준에 맞추어 나를 채찍질해 왔던 것이다. 비합리적 명명, 인지 왜곡이라고 했다. 나를 파악하고 내게 맞는 조절을 연습하고 열심히 살아온 나를 인정해 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별로이다가 아니라 어떻게 조절할까?로 가야 한다고 새로운 길을 제시받았다.
네 번째 회기 때에는 나의 만성화된 사고(이것도 핵심신념이려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매 회기 때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내가 지금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과 많은 핵심적인 부분이 원가정에서의 관계와 신념으로부터 대부분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나에게는 두 개의 것이 떠올랐다. 하나는 엄마, 하나는 아빠.
나는 어렸을 때 느리고 모질란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장녀 장남의 장녀로 태어났고, 나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들이 장래희망으로 대통령, 의사, 판사 같은 것을 써서 낼 때 나만 혼자 사회복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나는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느리고 똑똑하지 못한 아이 었고, 엄마는 내가 성적을 잘 못 받아오거나 뭔가 잘못하면 '너 하나도 못 챙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챙기겠냐'며 혼내셨다. 엄마의 의도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전에 너를 먼저 생각하고 최선을 다 하라는 거였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참 서러웠고, 지금도 나는 내가 뭔가 잘 못하고 부족하다 느껴질 때면 '내가 지금 남 신경 쓸 때냐, 나나 잘해야지. 남이나 신경 쓰고 사니까 내가 이렇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빠로부터 온 다른 하나는 '삶의 태도를 돌아봐라'라는 말이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면 아빠는 늘 그것 하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전에 잘못했던 비슷한 문제들을 열거하며 '너는 삶의 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릇을 깨면 그릇을 깬 것이 문제가 아니라 늘 부주의한 내 삶의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 나는 작은 문제에도 내 삶 전체를 돌아보며 검열해야 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성취와 윤리의 기준이 매우 높고 조건화된 수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나를 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잘할 때만) 타인도 조건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판단이 많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가 공황장애 같은 증상으로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 내가 '엄마 나 공부하기 힘들어'라고 했더니 엄마가 '힘들면 안 해도 돼. 괜찮아.'라고 했던 것이 지금도 위로가 된다. 놀랍게도 우리 부모님은 나의 힘듦에 공감해 주었던 적이 없었다. 그날이 내가 기억하는 첫날이다. (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의 코어 메모리 안에서는 그렇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사와 학교 부적응의 문제로 너무 외롭고 슬퍼서 엄마에게 '엄마 나 외로워' 한 마디 힘겹게 꺼냈을 때 엄마는 내게 '인생은 다 외로운 거야. 나도 외로워'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들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잘 극복하며 티 내지 않고 살아가는데 나만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느끼는 거구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정신이 나약한 한심한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아동학을 전공하며 가족학을 조금 배워보니 결국 재생산의 문제다. 원가정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새 가정을 꾸려 동일한, 또는 그 반대의 문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새 가정이 시간이 흘러 원가정이 되어 또 다른 새 가정을 배출한다. 부모님도 결국 그들의 부모님으로부터 온 문제들을 다른 양식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의도는 선했지만 방법이 엇갈렸다. 하지만 이제 우리 부모님은 그때와는 다른 분들이시다. 다행히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셨다. 나도 신앙으로 문제를 인지하고 풀었고 극복해 가고 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풀어지기 전에 이 상담을 받았더라면 부모님을 매우 원망하고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원망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렸고 최선을 다 해 잘 키우고 싶었을 뿐이라는 걸 이제 그들의 나이가 되어 보니 더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도 자식을 낳으면 완벽하게 키우지 못하겠지. 나의 선의가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지. 뭐 어쩌겠는가. 그것이 결국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일거다.
드디어 다섯 번째, 마지막 회기가 되었다. 사실 상담 전날 어떤 일이 하나 생겨서 무척 우울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건 아니지만 나로 인해 불편한 사람들이 생긴 일이 있었다.
작은 실수나 문제에도 나는 "내가 또"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문제라고 했다.
사람마다 기질이 있는데, 그 기질마다 장단점이 있다. 나는 내 기질의 장점은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 장점에 대한 인식만 명확해도 수치심이 덜어진다고. 장점은 뭐겠다 정도가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한다. 문제가 생기거나 지적을 받았을 때마다 행동수정을 넘어 나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나의 검열과 자책은 한국에서 살 때보다 미얀마에서 살면서 더 심해졌다. 한국은 모두가 한국인이고 그 안에는 기질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유난스럽다는 느낌을 많이 받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와 살다 보니 미얀마 사람들 사이에서는 난 외국인이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공통점이 많이 없는 사람이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고, 남편의 일 때문에 이곳에 와서 주부로 육아를 하고 계신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주재원 분들도 많으시고, 주재원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 부부랑 다른 케이스의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상하리만치 한계가 있다. 특히 미얀마에서 기혼 여성으로서 일을 하고 있고 자녀가 없다는 것은 꽤나 외롭다. 여자분들의 많은 인간관계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통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만 봐도 그들의 한가한 시간에 나는 일을 하고 내가 한가한 시간에 그들은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나와 유사한 라이프 패턴을 가진 사람들과 지낼 수 있지만, 미얀마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던 것 같다. 나의 장점보다 나의 부족한 점이 더 보였던 것이다. 그들(다수)의 삶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삶도 틀린 것이 아니었는데, 왜 이리 남 눈치를 보며 대중적이지 못한 나를 나무랐는지 모르겠다.
일을 하고 애가 없으며 외향적인 것이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인 것을. (한국이었다면 보통의 보통의 보통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 '대중적이다'라는 것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을 그 때는 알아도 알지 못했다. )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5년을 미얀마에 있었다. 그 10년 중에 4년이 대학생활이었으니, 사회생활 6년 중에 1~2년만 한국에 있었고 5년을 미얀마에서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지낼 때는 코로나여서 집 밖을 못 나갔다...) 내가 한국 사회를 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경험이 부족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도 시골에서 거의 고립된 채 살았었고 한국에 돌아와 취준 하면서 다녔던 모든 면접에서 '한국에 적응할 수 있겠어요?'라며 너는 뭔가 보통 한국애들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라는 식의 질문을 매우 여러 번 받으며 해외생활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런 취급을 받는다고? 하며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보니 한국인들과 있을 때 눈치를 많이 봤던 것 같다. 내가 너무 어리숙해 보일까 봐, 세상물정 모르는 애 같아 보일까 봐, 튀어 보일까 봐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이제 알겠다. 참 한심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모두에게 고유의 독특성이 있고 존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텐데,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나도 거기에 속하려고 노력하다가 실망했다가 혼자 쌩 쇼를 했던 그 시간들이 부끄럽다.
나를 좀 더 나답게 진단하고 어긋난 생각의 패턴을 상담을 통해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상담 선생님은 현재로서는 더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상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어쩌면 뻔한 내용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내 생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나온 확인이 필요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사람을 많이 만나본 경험이 있는 전문가에게 보이고 당신이 볼 때 나는 객관적으로 어떤 것 같나요? 나의 문제가 뭔가요? 묻고 싶었다. 전문가는 전문가다! 꽤 마음과 생각이 정돈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은 청소년기 때만 하는 건 줄 알았다. 사실 그때는 공부하느라 그런 고민을 거의 못했던 것 같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나는 누구인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로 고뇌에 빠졌었는데 지금도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가지치기가 되는 것 같다.
Tiny Mini Flowers를 멈추었던 나의 두 번째 이유는 해소가 되었다. 글을 시작할 때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았지만, 그냥 이런 엉망진창의 내가 애들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하는 게 너무 위선적이고 싫었다. 내 삶도 건실하게 가꾸지 못하면서 엄한 곳에 가서 속죄하는 마냥 아이들 앞에서 착한 사람인척 있는 것이 스스로 역겨웠다. 그래서 더 못하겠어서 멈췄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며 남 눈치도 많이 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도 주고 자책도 많이 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도전하길 좋아하고 열정이 많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살필 줄 알고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잘 해소할 줄 아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지만 길거리 아이들과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위선적이어서가 아니라 예민한 것도 나고 아이들을 살피는 마음이 있는 것도 나라는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Tiny Mini Flowers를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첫 번째 이유가 너무 강력해서 좀 쉬어가야겠다 싶다. 하지만 이 것은 장기프로젝트다. 마무리 시점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로 정했다. 어떻게 이어지고 확장되어 갈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기대어 살아서 알 수 없지만 글에서 띄어쓰기도 의미가 있듯, 내 인생 프로젝트의 띄어쓰기에도 의미를 꽉꽉 채워 넣으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