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지진 이후의 삶

❀tiny mini flowers❀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by Autumnlim

지진이 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진이었다. 이 전에는 지진이 났다고 해도 예민한 사람만 조금 느끼는 정도였거나 이동 중이었어서 못 느꼈었다. 2층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팽-하고 돌더니 어지러웠다. '내가 지금 몸이 안 좋나?'하고 생각하며 말을 멈추었는데 천장에 붙어 있던 조명들이 막 흔들렸다.


그렇게 몇 분 흔들렸다. 꽤 오랜 시간 흔들렸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머리가 멈춰버렸다. 멍하게 눈알만 도륵도륵 굴리다가 지인이 나가야 한다고 해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계산까지 하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건물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있었다. 모두 지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다들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나도 그랬고 말이다. 근처에 있는 호텔로 이동했다. 그래도 거기는 1층 로비가 있으니 또 지진이 나면 나오기 쉽겠다 생각하며 말이다. 멀미하듯 속이 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땅이 흔들렸으니 몸이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남편이 지진 때문에 사가잉-만달레이 다리가 무너졌다고 했다. 멍청이 같은 나는 '양곤이 흔들렸는데 거기 다리가 왜 무너져?' 하며 물었다. 양곤과 사가잉은 차로 18시간 정도 걸리는 약 800km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다시 검색해 보니 사가잉에서 난 진도 7.7의 지진이 양곤을 그 정도로 흔들었던 것이었다. 그 숫자를 보고도 감이 전혀 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뭔가를 알고 있다 한들 실제로 겪게 되었을 때는 아무짝에도 소용 없어지는 건지 내가 너무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오는데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계획했던 일정을 마치고 집에 와서 찬찬히 살피며 답장을 했다. 그제야 '아 이거 진짜 심각한 상황이구나' 슬슬 감이 왔다. 2층에 있었어서 그나마 흔들림이 덜 했던 것이었고, 고층에 있던 사람들은 물건이 떨어지고 서있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문득 여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권과 중요 서류, 돈을 한 번에 들고나갈 수 있도록 모아 챙겨 두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식탁에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만났을 때 '살아서 만났어!' 하며 진한 포옹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긴급구호가 시작됐다. 하루 종일 피해지역에서 보내오는 사진들과 영상을 보고 그걸 정리하고 상황 파악하며 연결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점점 더 '내 일'이 되었다. 진앙지인 사가잉은 약 2년 전부터 내전 때문에 전기과 인터넷이 끊겼고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라 피해 규모 파악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사가잉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 만달레이인데, 그곳은 내가 미얀마에 처음 왔을 때 지냈던 곳이었다.


10년 전, 2015년에 만달레이에서 미얀마와의 연을 시작했다. 그래서 만달레이는 내게 의미가 있다.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비자가 있어야 하는 나라에 간 거였고,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해외생활을 해본 곳이었다. 지금 내게 뗄래야 뗄 수 없는 이 미얀마라는 나라의 첫 시작을 한 곳이었다.


2020년 코로나, 2021년 쿠데타 그리고 끊임없는 내전, 2023년 태풍 모카, 2024년 태풍 야기, 2025년에는 대지진까지. 바람 잘 날이 없는 미얀마다. 한 동안 참 우울했다. 땅이 흔들리니 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지인들의 "괜찮냐"는 안부연락에 "괜찮다"라고 대답하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생활 터전을 잃은 상황에서 "나는 괜찮아"라고 대답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다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려 나가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양곤에 있다는 것이, 평소와 동일하게 차를 타고 다니고 더울 때 에어컨을 틀고 깨끗한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뽀송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그런지 밤마다 문득문득 깼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한가? 좀 흔들린 것 같은데? 여진 아닐까? 자느라고 흔들리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채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들과 마음 불편함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만달레이 피해가 워낙 커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레 호수에도 피해가 엄청나다. 인레 호수 안에 있는 집 대부분이 무너졌다. 배를 타고 집들 사이를 지날 때 마치 영화 세트장에 있는 것 같았다. 기울고 무너지고 잠긴 집이었던 것들과 튀어나온 나무와 찌그러진 철판들이 둥둥 떠 있었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데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감히 가늠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앞에서 내가 아프다 느끼는 것도 미안했다.


미얀마의 최대 명절인 띤잔이 다가왔다. 마트에 가니 신나는 띤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밝고 경쾌한 노래에 눈물이 났다. 마트에서 장보다 말고 눈물 닦고 있는 나를 누군가 봤더라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언제 다시 이 나라가 띤잔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 끝이 어디일까. 소화되지 않는 이 먹먹함에 속에 있던 것들이 문득문득 밖으로 밀려나왔다.


띤잔에도 우리는 일을 했다. 지진이 우리의 띤잔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남편의 일 때문에 띤잔 여행을 취소했었는데 이제 보니 남편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취소된 것 같다. 가려면 갈 수 있었겠지만 갔어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분주했을까 싶다. E와 만나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잠깐 만났다. 일이 끝나고 시간이 괜찮으면 길거리 아이들을 잠깐 만나러 가기로 했다. '시간이 괜찮으면'이라고 했지만 사실 꼭 가고 싶었다.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이유는... 글쎄. 그냥 나의 이 지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아이들을 통해 위로받고 싶었다. 나를 위해 나가고 싶었다.


빠르게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아이들 두세 명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인사를 건네자 낯익은 아이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를 기억한다며 우리와 함께 했던 것들을 나열했다. 자기 손에 스티커 붙여줬던 것도 이야기하면서 (당연히 지워져서 아무것도 없는) 손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독 똘망똘망하고 귀여워서 기억에 남았던 아이가 "왜 자주 안 와요? 맨날 와요!"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의 엄마들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함께 앉아 계셔서 아이들과 잠깐 시간을 보내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다. 그러라고 해서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 보여줬다. 아이들은 금세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자석처럼 착착 달려와 우리 곁에 붙었다.


"마음에 드는 것 한 장씩 골라!"라고 외쳤다. 아이들이 무아지경으로 달려왔기에 크게 외쳐야 했다. "한 장씩!!" "잠깐만, 금방 줄게!!"를 몇 번 외치고 나서야 모든 아이들이 한 장씩 원하는 그림을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라고 해봤자 그냥 도로 위였지만 말이다. 어떻게 반짝이는 포일을 그림에 붙일 수 있는지 설명해줬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정말 잘 따라왔다. 특히 딱 봐도 3~4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고 통통한 감자 같이 생긴 아이가 있었는데 우리가 하는 말을 따라서 말하며 야무지게 붙이는 모습에 반해버렸다. 너무 귀여워... 동글동글 알감자... 내가 감자 같다고 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들이 "감자래"하면서 깔깔 웃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만든 것을 우리에게 가져와 보여줬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척 뿌듯해했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 만든 아이들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여러 명이 몰려들며 자기도 찍어달라고 해서 에라이 그럼 다 같이 찍자! 하고 모이라고 했다.


E가 나도 같이 찍으라고 해서 함께 쪼그려 앉았다. 아이들이 서로 자기도 찍겠다고 달려들어서 아이들 사이에 갇혀 버렸다. 아이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땀냄새가 진동했다. 나도 모르게 E에게 '얼른얼른...' 하며 재촉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아이들이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주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봤는데,... 아니... 왜 다들 정색...?

누가 보면 내가 찍자고 억지로 끌고 와서 세워 놓은 줄 알겠다. 나만 웃고 있고 다들 아주 정색을 하고 찍었다. 어이가 없네 ㅋㅋㅋ



띤잔이 끝나가는 이 시점, 내 마음의 불편함은 조금 잠잠해졌다. 무뎌진 건지 강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또 나의 삶이 있음을, 그들과 너무 동일시하는 것이 건강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들을 하고 있다.


국제개발협력에 관한 교육을 듣고 있다. 작년 말부터 관련한 교육들을 찾아서 수강해 왔다. 세 개의 짧은 과정을 수료했고 지금 두 달짜리 교육을 수강하고 있다. 화목요일 저녁 3시간 토요일 (시차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7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 나름 강도 있는 교육이다. 엄청난 기대를 하며 시작하진 않았는데 들을수록 정말 알차고 유익한 강의들이다. 이 분야에 대한 시각을 넓혀 주고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아주 좋다.


대부분이 교육에 집중되어 있지만 주 1회는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네트워킹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중 한 분의 이야기가 유독 마음에 남고 힘이 되었다. 박사까지 하신 스펙이 대단한 분이셨는데 현재 한국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해외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 박사를 마치고 자녀가 둘이 되었을 때 남편의 파견을 따라 해외로 나가면서 이 회사에 입사했다고 하셨다. 그분의 이야기를 쭉 듣는데 그분이 박사를 했고 경력이 어떻고를 들을 때 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 생각하며 이렇게~ 했다. 그리고 이런~ 보람을 느낀다.' 하시며 '박사를 했어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몰랐다, 돈을 보고 하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정말 그 겸손함과 진심에 감탄이 나왔다.


다들 각자의 상황에서 겸손하게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개복치 같은 나의 마음과 정신상태를 돌아보았다. 인생이 쉬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차피 쉽지 않은 인생, 한탄하며 주저하기보다 겸손하게 끈질기게 한 걸음을 내딛으며 가는 게 빛나는 인생이겠다 싶다.


지진이 난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나는 이중고, 삼중고도 아닌 셀 수 없는 다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미얀마에서 산지 5년이 다 되어 간다.

오늘은 부활절이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찬양의 가사에 눈물이 났다. 부활의 기쁨, 부활의 영광. 그 모든 빛나고 귀한 것 이 전에는 끔찍한 십자가형과 사흘간의 죽음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말 힘들고 죽음이 우리를 곧 삼킬 것만 같았을 때 부활 전 죽음의 시간, 짙은 어두움의 시간이 있었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미얀마에게도 지금 이 짙고 짙은, 끝없어 보이는 어두운 시간이 부활을 앞둔 시간이기를 바란다.

이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있는거라면 기꺼이 있어야 하겠지. 오늘은 부활절 기념으로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계란을 삶아서 나갔다. 알감자 같이 생긴 귀여운 아이가 나를 먼저 발견했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수줍게 인사를 해줬다. 계란과 두유, 빵을 나눠줬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잔디에 앉아 꽃을 실에 꾀고 있었다. 만든 것을 다음날 길에서 팔거나 다른 곳에 팔겠지 싶다.


7.7 지진 이후의 나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그만큼 큰 부담이 생겼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징징거리며 감상에 젖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나의 발버둥이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노젓기 같기를 바란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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