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lim Jul 20. 2024

얘들아, 동화책 읽어줄게 들어볼래?

❀tiny mini flowers❀ 세 번째 이야기

07.06 토요일 4:20-5:10p.m.


처음이라 너무 떨렸다.

이 날이 얼른 오기를 바랐지만 얼른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낯선 길거리 아이들을 불러 모아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심지어 미얀마어로) 얼마나 긴장되는 일이던지!


접이식 의자와 돗자리를 엉거주춤 들고 책이든 가방을 어깨에 매고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평소에 그렇게 많이 보이던 아이들이 갑자기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비가 왔다 그쳤다 하니 다리 밑에서 읽는 것이 좋겠다 싶어 다리로 갔다. 두 세 무리 정도가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도 있었다. 빨간 불이 되고 차들이 멈추자 아이들이 신나게 차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한 차에서 창문을 내리고 과자를 나눠 주니 받은 아이들이 못 받은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 신나게 과자를 받아먹었다.


유난히 미소가 밝아 보이는 아이가 있어 다가가 말을 걸었다. E가 ‘동화 읽어 줄게 들어 볼래?’ 묻자 망설이며 살짝 경계하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차가 멈춰 있어서 구걸을 해야 하니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움직이면 오겠단다. 그래. 업무 방해를 해서는 안 되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저 멀리서 엄마가 보았는지 아이를 부르더니 동화를 듣지 말라고 했다. 아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배가 아파서 못 듣겠어요’라고 했다. 거절하는 게 미안한 건지 엄마의 강경한 태도에 민망한 건지 몰라도 우리에게 딱 잘라 말은 못 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이만의 사려 깊음인가 싶어 고마웠다.


아무래도 두 성인 여자가(그것도 한 명은 외국인이) 아이들에게 바로 다가가서 뭔가를 읽어주겠다 하는 것은 수상해 보이려나 싶어서 작전을 변경했다. 옆에 있는 어른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쟤네는 뭘 하는 건가 싶었는지 우리를 구경하던 구걸하는 아주머니께 ‘제가 미얀마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책을 잘 읽는지 들어봐 줄 수 있어요?’ 여쭈니 관심을 가지셨다. 그 얘기를 듣던 다른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가서 들어봐!’ 했다.


나이스!



얼른 돗자리를 깔고 (욕심껏 큰 돗자리를 샀는데, 아이가 한 명이어서 다 피지 않아도 됐다.) 아이를 앉히고 나는 작은 접이식 의자를 펴서 앉았다. 돗자리에 앉으라고 펴줬는데 돗자리가 아닌 바닥에 앉는 모습도 마음 아팠다. 아무튼 아이의 마음이 떠나기 전에 서둘러 시작했다.

한국이라면 만 1세 정도 수준의 단순하고 짧은 책을 읽어 주고 몇 번의 질문을 하며 호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귀여운 스티커와 간식을 주었다. 원래 계획은 미끼 상품처럼 어버버 거리는 외국인인 내가 흥미를 끌며 짧은 것을 읽어 주고 E가 유창하고 재밌게 조금 더 긴 동화를 읽어주는 것이었는데, 이 아이는 여기 까지만 듣고 두 번째 동화는 안 듣겠다고 했다. 아이의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래도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주말에만 엄마 따라서 이곳으로 나온다고 했다. 어머니는 길에서 물이나 작은 간식들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동화 읽기를 마치고 좀 자신감을 얻어서 옆에 있던 두 번째 아이에게 향했다. 이 아이는 엄마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엄마 품에는 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고 있었다.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며 책을 읽어 주겠다고 하니 엄마가 들어보라고 아이에게 말해주어 이번에도 얼른 시작했다. 이 아이는 3살이었다.



책 표지에 있는 동물들을 가리키며 ‘이건 무슨 동물이야?’를 물었는데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개구리, 돼지, 사슴, 닭, 새였는데 하나도 말하지 못했다. 책 내용 중에 개구리가 우는 모습이 있어서 개구리는 어떻게 우는지 물었는데 이 또한 답하지 못했다. 내가 따라 해 보라고 하는 말들은 그래도 따라 해 보려 노력하는 모습이 있어 귀여웠지만 3살이 되도록 이런 흔한 동물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E도 이때 많이 놀랐다고 했다.

이 아이는 두 번째 이야기도 듣겠다고 해서 드디어 E가 책을 읽어줬다. 아주 능숙하고 재미있게 읽어주었는데, E는 아이들 관련한 거라면 뭐든 잘하는구나 싶었다. 그제야 나도 잠시 마음을 놓고 아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가 잘못 읽을 까봐 책에 집중해야 해서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눈 맞춤을 하며 교감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아이 앞에서 미얀마어를 능숙한 척 읽는 것은 긴장된다.)


그제야 보인 아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세 살 다운 에너지가 전혀 없었고 어깨는 축 처지고 등은 힘 없이 굽어 있고 표정도 없었다. 엄마를 보니 엄마도 똑같이 앉아 있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 보고 자란 모습이 무표정과 무기력함과 힘없음이구나 싶었다. 고작 3살짜리 아이가 너무나 노숙자처럼 보이는 모습이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 번째 아이를 찾기 위해 조금 걸었다. 육교에 두 명의 아이들이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쿠데타 이후로 출입을 막아 놓은 곳이라 우리는 올라갈 수 없어서 아이들을 불렀다.


‘동화 읽어 줄게 들어 볼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 아기 원숭이들처럼 겅중겅중 내려오더니 출입을 막기 위해 쳐 놓은 철조망을 덥석 잡으며 그 사이를 뚫고 내려왔다. 아무리 마르고 작은 아이들이어도 철조망에 걸리면 옷이 찢어지거나 큰 상처가 생길 것 같은데 말이다. 아이 한 명이 너무 위험하게 나오길래 다른 한 명에게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 '철조망 안에서 들어도 돼!' 하면서.


한 명은 철조망 앞 계단에 앉고 한 명은 철조망 뒤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말을 하니 앞에 있는 아이가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러자 뒤에 있는 아이가 동시통역(?)을 해줬다. 그 아이는 내 발음을 잘 알아듣고 친구에게 이야기해 줬다. 고마워라 ㅋㅋ 책을 읽으며 질문하고 답하고 개구리울음소리를 내보고 토끼처럼 발도 굴러보며 짧지만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나도 세 번째 읽으니 긴장이 좀 풀려서 좋았다. 아이들은 매일 이곳에 온다고 했다. 집이 멀지만 여기에 와서 논다고. 더 자세히 물어보진 못했다.



현지인인 E가 더 많이 읽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더 많이 읽었다. 이런 나의 부족한 언어 실력이 마음을 열게 하는 도구가 될 줄이야! 감사했다.


오늘은 이렇게 네 명의 아이들, 세 번의 동화 읽기로 마무리 지었다. 몇 명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려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첫날인지라 무리하지 않고 이만 마무리하기로 했다.


역시나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책 보다 이야기 책을 읽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이 나라에는 아름다운 그림의 어린이 동화책이 거의 없어서 구하지 못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겠다. 한국 동화책을 번역해 읽어 주면서 그림이라도 보게 해 주던가 말이다.


그리고 돗자리는 너무 큰 것 같다. 아이들을 한 번에 많은 수를 모으기보다 한 두 명씩 있는 곳에 찾아가 읽어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듯하다. 큰 돗자리보다 두세 명 앉을 수 있는 큰 방석? 같은 것을 찾아봐야겠다. 사실 아이들은 바닥에도 그냥 잘 앉지만 우리 마음이 불편해서 …


아무튼 생각보다 시작이 좋다. 다음 주에는 평일에 퇴근을 하고 나가기로 했다. 아이들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요일, 장소를 탐색해야 한다. 그래도 한 번 해보고 나니 이제 떨리지 않는다. 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족한 언어 실력이 오히려 도움이 된 다니 자신감도 생긴다. 물론 이 자신감은 앞뒤로 커버해 주는 E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다음 주에 갔을 때 오늘 만난 아이들을 또 만날 수 있으면 더 반가울 것 같다. 색종이 접기나 스티커 붙이기 같은 간단한 활동을 해도 재밌겠다. 얼른 다음주가 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다운 보드라움과 향기로움이 피어나기를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