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낙.
아침이다.
항상 거실과 부엌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기 직전에만 침실로 들어가서 자는 나는 늘 블라인드 내리는 걸 깜빡하는데 덕분에 아침에 해가 밝으면 저절로 자연광에 눈이 뜰 때가 많다.
꽤 오래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밤엔 잘 자고, 아침엔 눈을 잘 뜨고' 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침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가는데,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가기 때문에 시간 맞춰 오전에 요가 스튜디오를 예약해서 다녀오면 조금 더 시간을 알차게 쓴 기분이다.
자다 일어난 채로 준비해서 버스 타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참고로 Soba 스튜디오는 보통 어플을 사용해서 미리 주어진 정원에 맞게 예약을 하고 수업을 듣는 구조다.
한 1-2주 치의 스케줄이 오픈되어 있는데 나는 좋아하는 선생님 클래스는 꼭 듣고 싶어서 대학 때 수강 신청하던 마음으로 열심히 예약을 미리 해둔다.
오늘은 Gina 선생님이 하는 클래스.
선생님마다 수업을 하는 강도가 조금 다른데 Gina 선생님은 보통 힘든 Pilates나 Barre 수업을 많이 한다.
덕분에 비장한 마음으로 수업 시작을 기다리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이렇게 빡빡한 수업을 새벽부터 연달아 3 타임씩 하는지 정말 신기하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가끔 뒷마당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쉬고 있는 모습을 몇 번 봐서 그런지 더 멋져 보이는 선생님.
역시나 오늘 수업은 고강도였다.
미리 알고 간 거였지만 운동하고 나면 항상 다리가 후들후들.
그래도 가끔 수업 들으면서 이런 생각한다. 이런 운동을 업으로 삼아 몇 타임씩 매일 하는 분들도 있는데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정성 들여서 운동하자 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 몸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올려놓는 것도, 심지어 그런 운동을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도, 나에겐 크나큰 행복.
대신 운동 열심히 했으니 나에게 주는 상으로 베이글을 파는 카페인 NYC Bagel Deli에 왔다.
카페는 빌딩의 코너를 낀 채로 큰 창이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 큰 창 사이로 한쪽엔 햇빛이 쏟아지는 게 예뻐서 들어온 곳. 오랜만에 베이글을 한 번 먹어볼까 싶어서 고민 고민 중.
베이글이 6개에 우리나라 돈으로 8000원 정도 하는 거면 나름 합리적인 가격 같은데.
막 격한 운동을 마친 상태라 입맛이 없기도 하고 요즘은 밀가루를 최대한 피하고 있어서 커피만 시켰다.
항상 어떤 곳이든 정중앙보단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는 내가 고른 자리.
벽에 기대앉아 있으면 느껴지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햇살과 그늘이 만드는 식물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중.
사람 심리라는 게 정말 신기해서 역시 삭막한 콘크리트보다는 초록 초록한 식물을 곁에 둘 때 마음이 더 잘 누그러진다.
가게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어도 좋지만 오늘은 에어팟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쉬고 있는 중. 요즘은 khruangbin의 zionsville이라는 노래를 많이 듣는다.
사실 지금도 이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는 중인데, 만약 가을바람 특유의 설렘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끼고 싶은 분이 있다면 꼭 추천하는 음악이다.
풀밭에 누워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는 그런 기분의 노래.
보통 설렘과 쓸쓸함은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이상하게 극도로 설렐 때 쓸쓸함이 같이 오더라.
그래서 가을을 가장 좋아하고, 가을이 제일 아쉽다.
내년 가을이 오기까지는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니까.
올해 가을은 단 한 번뿐이다.
우리나라도 카페 인테리어 하면 손에 꼽는 곳들이 참 많지만 나는 호주의 카페 인테리어를 정말 좋아한다.
환경과 이질적이지 않고, 잘 조화되면서 개성을 잘 살린 곳이 많기 때문.
이 곳도 이 큰 창을 둘러싸고 있는 넝쿨들 덕에 창이 하나의 액자처럼 보인다.
확실히 사진 속 공간이 전부라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은 아니지만 뻥 뚫린 큰 창 덕분에 공간이 훨씬 커 보이고, 선선한 바람과 햇빛과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아늑한 공기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베이글 위주의 가게라 그런지 카페보다는 음식점 같은 분위기가 있지만 피크 타임 피해서 가면 충분히 혼자 한적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점심을 간단히 먹고 샤워를 하려고 울월스에 들러 스시를 사 왔다.
CBD 한가운데 있는 울월스는 규모도 크고 깔끔 깔끔해서 중간에 들러 음식 사 오기가 편하다.
아마 <Bachelor>를 보면서 밥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독신 남자 1명과 독신 여성 7-8명이 함께 모여 데이트를 하며 짝을 찾는 프로그램인데 어쩜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드라마틱할까?
거의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데이트하다 키스하고, 다음 날 집에 소개하고, 그런 행동을 7-8명의 여자들과 동시에 하며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 걸 보면 참 사랑과 연애도 에너지가 그만큼 넘치는 사람들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저녁을 직접 해 먹으려고 울월스로 장을 보러 왔다.
한 한 달간 찌개류를 먹지 않은 것 같아서 찌개에 넣을 재료들을 찾아보는 중.
간단한 요리도 하는 데는 2시간, 먹는 데는 20분이 걸리지만
그래도 아직은 식재료에서 요리가 되는 과정이 재밌는 유치원생 같은 마음이 있다.
마트에서 오늘 재료 사는 시간보다 베이커리 코너 앞에 서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밀가루나 버터는 잘 안 먹으려고 노력 중인데 가격이 싸도 너무 싸다.
게다가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 보니 더 먹고 싶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하지 말라는 건 꼭 더 하고, 하라는 건 죽어도 하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가 있었다.
한인마트에서 사 온 레토르트 찌개 베이스의 힘을 빌려 내 생애 첫 순두부찌개를 만들었다.
다듬어놓은 재료를 넣고 또 넣다 보니 마지막엔 급기야 냄비가 넘칠 것처럼 되긴 했지만
한 달만에 한식 찌개를 먹어서 그런가 정말 맛있던 한 끼였다.
그리고 먹는 그 순간보다 장보고, 재료 다듬고, 부엌에서 서성대는 그 순간이 더 즐거웠다.
나중엔 이 부엌 스툴에 누군가 앉아있으면, 그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서 요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것도 참 즐겁고
누군가랑 호들갑 떨며 밥 먹는 것도 즐거운 일.
둘 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거기서 정말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온다.
아이는 시험을 걱정하느라 놀면서도 잘 놀지 못해요. 공부할 땐 놀이터가 생각나서 괴로워하죠.
그 아이가 어찌어찌 학교에 학교를 거쳐서, 나름대로 분투하며 청년이 됩니다.
그 뒤는 어떤가요? 이제 그 청년은 '취직만 하면 뭐라도 할 텐데'라고 생각해요. 우울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막상 취직을 하면? '이 회사만 나가면 뭐라도 할 텐데'를 고민하죠.
또다시 '종일 일만 하는 게 아니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다가, 프리랜서가 돼요.
그러면 놀랍게도 '일이 들어와야 뭐라도 할 텐데'를 읊으며 딴짓을 합니다.
햇살이 있는 날엔 그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비가 오는 날엔 그 안에서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늘 같아 보여도 매일 다른 하루이기에
그 아름다움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으로.
그런 눈을 키워가고 있는 나의 하루하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