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겨울날 브리즈번을 산책하다가.
가끔 좋아하던 드라마가 끝나면 생각보다 더 아쉬울 때가 있다. 나름 몇십 시간 넘게 등장인물의 서사를 지켜보면서 같이 응원도 하고 때로는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가 다 끝나버린 거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나도 좋지만,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쩐지 그 주인공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데 지금쯤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래 지켜보고 좋아했던 만큼, 그 등장인물들의 현재와 미래도 궁금한 거다. 나는 이렇게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늘 그 시간 속에 멈춰있으니, 그 결말 후엔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고 계속 지켜보고 싶고.
다행히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은 많다. 허구의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 등장인물 중에도 유난히 계속 지켜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물론 영화 보듯, 드라마 보듯 그 인물의 상세한 배경과 히스토리까진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기로에 설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택을 해 나가는지 보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삼사십 대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기대가 되는 사람들. 잘 지내면 잘 지내는 대로 같이 기뻐하고 싶고, 못 지내면 못 지내는 대로 힘을 보태주고 싶다. 내가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서, 가끔 그 시선의 원천이 어디인지 궁금할 때도 있다.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아주아주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등학교 친구 Y다. 날씨로 따지면 구김살이라고는 없는 햇빛 같은 사람. 그래서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도 순식간에 녹일 사람.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1주일 만에 전학을 와서 모든 것이 낯선 나를 어찌나 살뜰하게 챙겼는지, 그 날 이후 우리 둘은 단짝이 되어 3년 내내 점심을 같이 먹었다. 학년이 바뀌어 서로 반이 달라졌어도 늘 유난했던 우리는 하도 서로의 반을 들락거려서 친구들을 늘 2배씩 사귀곤 했다. 심지어 수능날까지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한다며 Y는 배우지도 않았던 제2외국어를 나를 따라 똑같이 신청했고, 결국 수능날 점심도 같은 고사장에서 먹을 수 있었다. 졸업 후엔 기념으로 둘이서 일본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 어린 우리는 약속했었다. 각자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스물다섯엔 같이 일본 가서 살아보자고. 그렇게 Y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꿈을 키워갔다.
대학교 2학년. 약속한 스물다섯이 되기도 전에 세상은 Y를 잃었는데, 꿈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던 Y가 어느 날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었다. 미국 유학 중인 Y가 한국에 오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실수로 비행기를 잘못 타는 바람에 아직 가는 중이라며 나에게 막 설명을 해주던 꿈. 그 꿈속에 나온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깨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던 기억.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네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인 거 같애.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고, 요즘은 무슨 생각하는지, 좋은 사람은 만났는지, 지금은 또 얼마나 예쁠지 항상 궁금하고 알고 싶고 그래.
아무튼 나는 그렇게 Y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사는데, 그 자체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곤 한다. 누군가를 늘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건 결국 본인이 행복해지는 길. 사람은 결국 본인 마음의 크기만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Y랑 우리의 과거가 아닌 미래에 대해서도 같이 말하고 싶고, 요즘 하는 고민도 털어놓고 싶고, 축하와 위로도 나누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를 든든함이 차오르기도 한다. 늘 지켜봐줘. 나도 그때 우리가 꿈꿨던 좋은 어른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