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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Dec 16. 2020

#39 지켜보고 싶은 마음

더운 겨울날 브리즈번을 산책하다가.

햇살이 좋은 아침. 날씨가 좋으면 아침에 눈뜨는 그 순간부터 이미 기분이 좋다.


가끔 좋아하던 드라마가 끝나면 생각보다 더 아쉬울 때가 있다. 나름 몇십 시간 넘게 등장인물의 서사를 지켜보면서 같이 응원도 하고 때로는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가 다 끝나버린 거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나도 좋지만,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쩐지 그 주인공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데 지금쯤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래 지켜보고 좋아했던 만큼, 그 등장인물들의 현재와 미래도 궁금한 거다. 나는 이렇게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늘 그 시간 속에 멈춰있으니, 그 결말 후엔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고 계속 지켜보고 싶고.

아파트가 강 바로 앞에 있어서 오늘은 강변을 따라 쭉 걷다가 야경까지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은 많다. 허구의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 속 등장인물 중에도 유난히 계속 지켜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물론 영화 보듯, 드라마 보듯 그 인물의 상세한 배경과 히스토리까진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기로에 설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택을 해 나가는지 보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할 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삼사십 대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기대가 되는 사람들. 잘 지내면 잘 지내는 대로 같이 기뻐하고 싶고, 못 지내면 못 지내는 대로 힘을 보태주고 싶다. 내가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서, 가끔 그 시선의 원천이 어디인지 궁금할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더운 겨울은 처음이다. 아니 더운 12월.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아주아주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등학교 친구 Y다. 날씨로 따지면 구김살이라고는 없는 햇빛 같은 사람. 그래서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도 순식간에 녹일 사람.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1주일 만에 전학을 와서 모든 것이 낯선 나를 어찌나 살뜰하게 챙겼는지, 그 날 이후 우리 둘은 단짝이 되어 3년 내내 점심을 같이 먹었다. 학년이 바뀌어 서로 반이 달라졌어도 늘 유난했던 우리는 하도 서로의 반을 들락거려서 친구들을 늘 2배씩 사귀곤 했다. 심지어 수능날까지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한다며 Y는 배우지도 않았던 제2외국어를 나를 따라 똑같이 신청했고, 결국 수능날 점심도 같은 고사장에서 먹을 수 있었다. 졸업 후엔 기념으로 둘이서 일본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 어린 우리는 약속했었다. 각자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스물다섯엔 같이 일본 가서 살아보자고. 그렇게 Y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꿈을 키워갔다.

브리즈번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캥거루 포인트로 올라가는 길.


대학교 2학년. 약속한 스물다섯이 되기도 전에 세상은 Y를 잃었는데, 꿈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던 Y가 어느 날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었다. 미국 유학 중인 Y가 한국에 오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실수로 비행기를 잘못 타는 바람에 아직 가는 중이라며 나에게 막 설명을 해주던 꿈. 그 꿈속에 나온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깨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던 기억.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네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인 거 같애.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 같고, 요즘은 무슨 생각하는지, 좋은 사람은 만났는지, 지금은 또 얼마나 예쁠지 항상 궁금하고 알고 싶고 그래.

계단을 열심히 따라 올라가면 해가 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해 질 녘 클라이밍도 할 수 있고.


아무튼 나는 그렇게 Y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사는데, 그 자체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곤 한다. 누군가를 늘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건 결국 본인이 행복해지는 길. 사람은 결국 본인 마음의 크기만큼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Y랑 우리의 과거가 아닌 미래에 대해서도 같이 말하고 싶고, 요즘 하는 고민도 털어놓고 싶고, 축하와 위로도 나누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를 든든함이 차오르기도 한다. 늘 지켜봐줘. 나도 그때 우리가 꿈꿨던 좋은 어른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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