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완 섬 언더그라운드 리버
20대엔 여행이 하루하루를 꽉 채우는 거라 생각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면 중고 여행책을 사서 도시마다 동그라미를 치고 동선을 짜다 인터넷 카페에 ‘일정 좀 봐주세요.’ 하고 올린 초보들의 일정과 고수들의 답변을 조합해 장소와 시간을 넣었다 뺐다. 그러다 보면 어느 곳이라도 당일치기로 근교를 다녀오는 것은 필수였다. 그럴 때면 열심히 동행을 구했고, 그게 안 되면 여행사 투어를 했다. 투어 가격이 현지 물가에 비해선 굉장히 비싸지만, 우리나라 물가로 생각하면 하루 정도 다녀오기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투어는 외국인 전용이라 괄호를 친 쾌적한 차와 현지식 뷔페, 각종 팁이나 환경세 포함 등의 옵션을 크게 걸어 놓고 쇼핑센터 없는 상품이라 안심시켰다. 가는 길에 어느 사원도 들리고 어떤 체험도 한다며 1석 2,3조의 투어 상품이라 설득도 했다.
직접 발품 파는 대신 돈 더 쓰고 편하게 가자. 아마 많은 이들이 그렇게 패키지여행을 떠날 거다. 알아서 사진 찍을 스폿에 내려 주고 가이드들이 잘 나오는 구도로 사진도 찍어 준다. 시간도 부족하고 떠밀려 다니더라도 사진이 남았으니 됐어, 한다.
언더그라운드 리버Underground River가 그랬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언더그라운드 리버는 말 그대로 땅 속에 흐르는 강이다. 한국에선 ‘지하강’이라 직역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산 밑의 동굴이지만 동굴 길이가 24킬로미터, 지하수가 만든 강은 8킬로미터에 이른다. 높이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도 있다 하니, 자연의 신비라면 껌뻑 죽는 니콜라스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장소는 없을 거다. 그러나 하루에 입장객이 제한되니, 환경세를 내야 하니,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어 따로 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하니 등 여러 제약스런 일들이 많다. 팔라완에 왔으니 꼭 가야만 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비용이 비싸지만, 별생각 없이 투어를 예약하기로 한다. 8시간짜리.
‘하루 정도야 뭐.’
아침 7시, 차를 탄다. 교통이 불편한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선 차량이 숙소까지 픽업을 온다. 두 번째 순서였던 우리는 차를 탄지 한 시간이 되도록 아직 푸에르토 프린세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신이 가득한 호주 할아버지와 젊은 필리핀 아가씨, 세상만사 관심 없는 젊은 미국인 커플, 마닐라로 이주한 부모님을 만나러 왔다가 아쉬워 팔라완에 들린 남아공 여성, 타이완 레즈비언 커플과 우리. 이렇게 9명이 출발한다. 가이드는 언더그라운드 리버에 대한 짧은 브리핑을 마치고 관광객이 많아 오래 대기해야 할 것 같다며, 우공Ugong이라는 석회암 바위에서 짚라인을 먼저 타러 가고 밥을 먹고 오후에 언더그라운드 리버로 갈 것이라 한다.
논 한가운데 솟은 거대한 석회암. 우공Ugong에 도착한다. 티비가 설치된 공간에 모여 짧은 짚라인 영상을 감상하고 이건 ‘옵션’이니 타도 되고, 안 타도 된다고 한다. 짧은 하이킹과 짚라인을 타고 즐기는 경치는 환상일 거라며.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 뭐, 하는 표정으로 따라나선다. 필리핀 아가씨 혼자 짚라인에 보낸 호주 할아버지와 우리만 남는다. 비싼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호주 이야기를 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늘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는 이내 지겨워 나가서 동네라도 돌아보자, 하고 나선다. 주인 없는 오두막을 지나 논 한가운데 지어진 학교를 구경한다. 단층에 슬레이트를 얹은 단출한 모양새지만 알록달록 풀을 닮은 초록색이 참 예쁜 시골 학교. 쉬는 시간인지 아이들이 바삐 들락인다. 고개를 넘어 멱을 감는 소를 만난다. 정오의 태양에 얼굴이 익어간다. 짚라인은 다들 그저 그랬다 한다. 짚라인을 타고 기념사진까지 사서 나온 필리핀 아가씨에게 할아버지는 돈 얼마를 쥐어 준다.
10시 반. 뷔페식 식당. 줄을 지어 음식을 담고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먹는다. 보통 니콜라스가 이것저것 묻고 친구를 만드는 편인데 조용한 걸 보니, 4시간 동안 언더그라운드 리버 코빼기도 보지 못한 이 여행이 썩 즐겁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알고 보니 그는 이런 패키지여행을 난생처음 해 본단다. 익숙지 않겠구나. 경험자로서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라 조언한다. 식당 앞으론 봉고차가 계속해서 관광객들을 나른다.
다시 차를 타고 사방Sabang 비치 도착. 언더그라운드 리버로 가려면 여기서 대나무 지지대를 붙인 나무 보트 방카Bangka를 타야 한다. 방카는 나무 보트 양옆으로 팔을 벌린 듯한 지지대가 출렁이는 파도에도 균형을 잡아 준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이어지는 석회 절벽들. 멋진 경치에 피곤함이 조금 가신다. 절벽 사이사이 나타나는 백사장. 수직으로 날렵하게 침식된 암석들. 팔라완은 이 회빛 암석들로 이루어진 섬이다. 거대한 창들이 삐죽삐죽 솟은 모양새. 무엇을 지키려 이토록 사납게 버텨왔을까.
해변에서 몇 분 걷지 않아 동굴 입구에 도착한다. 황금빛 모래를 덮은 물을 만난다. 석회가 녹은 지하수와 바닷물이 처음 만나는 곳. 분명 찰박한 얕은 물인데 두껍게 느껴진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탁하고 푸른 에메랄드빛으로 그러데이션 된다. 난생처음 보는 빛깔. 동굴을 떠돌며 부유하던 생명들도 제 몸이 어떤 색을 지닌지도 모른 채 살아오다 난생처음 빛이란 걸 보았을 거다. 그 따뜻함과 강렬함에 너무 신나 오묘한 색을 내는지도 모른다.
동굴은 무동력 나룻배로만 들어갈 수 있다. 앞서 온 다른 투어팀들이 들어가길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 배에 오른다. 가이드가 오디오 가이드를 하나씩 나눠 준다. 너는 프랑스어, 나는 한국어. 배가 천천히 출발한다. 박쥐 울음이 우리를 맞는다. 오로지 사공의 플래시 불빛에만 의지해 나아간다. 생태계에 최소한의 영향만을 끼치기 위해서. 동굴의 스케일이 너무나 커서 어둠 너머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타이타닉, 천사, 조금은 억지스럽게 붙인 이름들보다 그저 자연 그대로의 거대한 종유석과 석순들, 쏟아질 것만 같은 매끄러운 돌덩이들이 마음을 압도한다. 20여 분이 지나 보트는 커다란 홀에 들어선다. 물이 몇 만 년을 녹여 만들었을 거대한 공간. 천천히 턴을 한다. 앞 뒤에 있는 보트들과 가까워진다. 사공들의 플래시가 이곳저곳에 겹쳐진다.
한 번씩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눈을 감으면 마법처럼 샹들리에가 켜지고 무도회가 펼쳐지는 그런 모습. 이 크고 깜깜하고 둥그런 홀에서 춤을 추는 모습. 어느새 보트는 되돌아가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40분 구경하는 데 하루를 꼬박 쓰다니. 동굴은 너무 좋지만, 아침 7시부터 기다리기만 하느라 지쳤단다. 마치 자기가 우르르 몰려가는 비둘기가 된 기분이라며. 무릇 서비스 상품이란 항상 고객의 ‘기분’을 케어해야 하는데, 여긴 그저 고객의 ‘돈’만 케어하는 것 같다고. (웰컴 투 사우스이스트에이시아 니콜라스!) 차라리 스쿠터를 빌려서 우리끼리 올 걸, 한다. 각을 보니 사방 비치까지 오기만 하면 선장들과 협상해 남는 보트 자리에 바로 탈 수 있는 구조다. 당연히 그들은 한 명이라도 더 태우는 것이 남는 장사니까. 우린 그게 귀찮아서 지레 알아보지 않고 미뤄 버렸다. 그 결과로 얻은 건 오늘 간 장소에 대한 브리핑과 몇 농담. 퀴즈. 기다림. 잠시 만난 여행자들, 그리고 차 안의 공기.
오는 길엔 다들 잔다. 적막한 차 안. 우리는 오늘 놓친 걸 얘기한다. 여행의 날씨, 여행의 온도, 여행의 자유. 쉬고 싶을 때 쉬고 멋진 바다가 나오면 수영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싶은 커피를 마시는 자유. 여행이란 학습이 아니라 자유니까. 남을 따를 필요가 없다.
돌아보면 어렸을 때는 투어 상품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 열심히 가격을 비교하면서 좀 더 저렴하게 흥정하는 것을 ‘능동’적이라 느꼈다.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차를 세우면 메뚜기처럼 찍고, 찍고 떠나는 비슷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 ‘내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장소를 마주했을 때의 뿌듯함은 있지만, 온전히 스스로 즐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여행이라는 나만의 제한된 시공간을 남의 리듬에 맞추어 움직인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오늘 그 아이러니한 허탈감을 다시 느꼈다. 수동엔 언제나 능동적인 대안이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에도. ‘가고 싶다’ 생각만 했지 과정을 미루며 결국 남에게 나를 맡겨 버린 오늘. 과정의 자유를 포기한 것. 예상 가능한 허탈.
하나둘 비몽사몽 안녕- 하며 차에서 내린다. 우린 숙소 근처 시장에서 밥을 먹는다. 가장 달아 보이는 반찬 세 개와 밥을 시킨다.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며 한가득 밥을 퍼 주는 사장님이 고맙다. 내일이면 엘 니도로 떠난다. 큰 모험이 시작될 거다. 레드 호스를 기울이며 다짐한다.
“우리 다시는 여행사 투어하지 말자. 무엇이든 스스로 하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여행을 하는 거야. 우리여서 가능한 일들을 우리 힘으로. 그렇게 곳곳마다 우리만의 기억을 남기고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