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어떤 상태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오늘은 이름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말해보려 한다.
그보다 더 나쁜 것들도 있다.
잘못된 이름을 붙이는 것.
단지 이름이 없을 뿐인데,
혹은 잘못된 이름을 붙여왔을 뿐인데,
겨우 그런 작은 행위가 우리 삶을 얼마나 왜곡되게 갉아먹어 왔는지를 말해보겠다.
어지간한 현대인들은 할 일을 미뤄두고 안 하고 있으면,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곧잘 느끼곤 한다.
계속 이걸 해야 하는데.. 하면서 행동은 시작하지 않고,
자꾸 딴짓을 한다.
괜히 책상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평소에 안 하던 운동을 하고 싶어 하고,
딴생각을 하다가 다른 글을 읽고,
해야 할 일 빼곤 세상 일들이 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다.
이 정도면 차라리 낫지.
아무것도 안 하고 유튜브 숏츠만 보거나,
그냥 누워있거나,
멍하게 있으면,
죄책감은 더해진다.
문제는 이 행동들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을 시작하는 행위'에만 시야가 고정돼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늘 생산하는 시점만을 생각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순간,
결과가 발생하는 시점.
생산적 일을 시작하는 시점.
오직 여기에 시야가 좁아져 있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시야가 좁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더 넓게 볼 수 있는 이름이 없었고, 지금의 상태를 잘못 해석하게 하는 잘못된 이름 탓이다.
우리가 딴짓이라 생각하는 그 모든 행위들을 하는 순간은
사실 '리듬 전환 페이즈'다.
그 시간 동안 사실 우리의 상태가 계속 변하고 있다.
신경계가 조절되고 있고,
주의가 재배치되고,
다음 행동을 위한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구간이다.
'생산성' '성과' '결과'라는 지표만 가지고는 보이지 않는 구간이어서,
겉으로는 비생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리듬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구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간을 딴짓이나 미루기라고 부르지 않고, '리듬 전환 페이즈'라고 부른다.
이건 타이밍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루는 것 같은 게 사실은 전환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구간에 잘못된 이름을 붙이면 폐해는 더 커진다.
미루기
게으름
주의 산만, 딴짓.
이렇게 잘못된 이름을 붙이면 항상 죄책감이 따라온다.
죄책감 때문에 리듬 전환 페이즈 내내 불필요하게 괴로워한다. 때로는 죄책감에 쫓겨 아직 타이밍이 제대로 무르익지 않은 전환 상태에서 억지로 행동을 밀어붙이기도 한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집중이 잘 되지도 않고, 결과물의 성과도 높지 않고, 스트레스는 쌓여가며 몸의 부담도 늘어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이 상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잘못된 이름 때문에, 전환 상태를 낭비로 여기고 정상 상태를 오류로 인식해 왔다.
리듬 전환 페이즈는 생산 이전의 필수 단계다. 이렇게 인식을 바꾸면 죄책감 구조가 해체된다.
노파심에 기존 행동과학이나 자기 계발에서 주장하는 조언과의 비교를 덧붙이겠다.
사실 미루기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 중 하나가 시작 마찰을 줄여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이 점은 동의한다. 그래서 운동하기 싫으면, 미리 운동할 세팅을 다 갖춰놓고 바로 1-2분 만에 할 수 있는 동작 하나로 시작한다든지, 공부도 책상에 앉아 한 문제, 한 단락만 보라는 식이다. 일단 행동으로 페이즈 전환이 일어나면 그다음이 조금 더 쉬워지기는 한다.
- 시작 마찰을 줄여서 실제로 작은 행동을 시작하기
이건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의 마찰 단계의 가치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일반적인 자기 계발 루틴형 조언들은, 미루기에서 해치워야 할 과제들의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정답이 있는 형태의 반복 업무다.
운동, 암기, 틀이 정해진 업무 등등...
그런데 사실 우리가 미루고 있는 상황의 업무가 창조와 생성을 요구하면 단순히 시작을 밀어붙이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문 쓰기, 글쓰기, 창의적 문제 해결 상황 등 창조적 문제 영역은 물론이고, 흔히 공부나 운동으로 묶여 보이는 활동도 그 안에서 내가 처리해야 할 지점이 나눠진다. 단순 암기, 루틴형 운동을 할 때는 일단 시작하는 게 좋다. 그런데 새로운 개념 이해, 연결, 잘 안되던 동작을 시도해서 넘어가야 하는 순간은 이 역시 생성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시점 앞에서 우리 뇌와 신경계가 잠시 멈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건 기존에 우리가 '공부' '일' '운동'처럼 카테고리로 인식하던 부분을 실제 구성 요소와 요구 자질을 분해하는 관점이 더 필요하다. 그건 차후에 더 언급하기로 하되, 오늘은 그 이전 단계, ‘리듬 전환 페이즈’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