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파종했던 바질 씨앗에서 싹이 났다.
씨앗을 심고도 며칠간 통 소식이 없길래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그제 보니 새끼손톱의 반에 반 만한 싹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고 작은 것이 얼마나 예쁘던지 내내 마음이 설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지금은 눈독에 죽을까 싶어 애써 무시하고 있다. 바질 씨앗은 아주 쥐콩만 해서 뿌리고 나면 흙이랑 구분도 잘 안 간다. 요 작은 것에서 총 열 개 정도의 싹이 났는데, 실은 사십 알도 더 되는 씨앗을 심었다. 마흔 개 중에 열 개가 싹을 틔웠는데 이 중에서 몇 개나 떡잎이 날까. 그리고 몇 개나 온전한 바질이 될까.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다 비슷한 것 같다.
좋은 마음을 여러 개 심어도 다 좋은 결과로 돌아오진 않는다. 내가 건넨 사랑이 싹을 틔워 꽃이 되기도 하지만, 싹은 커녕 심은 줄도 모르게 죽어버리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타인이 건넨 사랑이 내 무심함으로 말라죽어버리기도 했다. 개중 몇 개는 싹이 트고 대가 자라 벗이라는 이름의 커단 나무가 됐고, 나는 그 나무에 이따금씩 기대어 잠을 잘 수도 있었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마음 중에 몇 개나 나무가 됐을까.
근간에는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다. 인생의 반도 넘게 화판 앞에 앉았지만 나는 그림이 뭔지 모르겠다. 예술은 또 무엇이고 작가는 또 뭔가. 작가는 되는 건가 되어지는 건가.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면 작가가 되는 건가, 누가 작가라고 부르면 작가가 되는 건가. 나는 뭘 위해서 뭘 그려야 하나. 자기 위로나 생계 수단 이상의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또 잘 모르겠다. 어느 날엔가는 예술이 뭔지 명확하게 알 것 같다가도 또 어느 날엔가는 도통 무엇인지를 모르겠어서 하염없이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림 밥을 먹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바질 씨앗 같은 그림을 계속 그리려고 한다. 마흔 점 중에 열 점은 고사하고, 사백 점 중에 한 점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떨어져 싹을 틔웠으면 한다. 커단 소나무가 아니라 한 해 살이 바질이더라도 생은 의미가 있지 않겠나. 그러니 일단 씨를 뿌리듯 작업을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대단한 작가는 못돼도 누군가의 수첩에 스크랩이라도 되겠지.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읽어내진 못해도 찰나의 마음에 잠시 닿을 수는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질 화분에 물을 주었다. 연한 녹색이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시에 뜯어먹을 생각을 하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 하지만, 뭐... 아무튼 지간에 올 가을엔 무농약 유기농 바질 페스토를 먹을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