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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12. 2023

굿모닝 쿡모닝

쇼핑 카트는 내 영혼을 싣고 달린다


누가 봐도 대식가는 아니지만, 밥에 진심이다. 나도 음식을 섭취하며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정갈한 한 상을 보면 어떻게 차려냈을지 궁금해지고, 화려한 디저트를 보면 밥 먹기 전에 몰래 한 개 집어 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알려지지 않은 맛집을 발견했을 땐 나만 알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고 동네방네에 홍보할 정도로 기쁘다. 밥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밥에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 그랬으나 독립한 이후로 한 끼 제대로 챙겨 먹는 게 생존 이슈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 살 땐, 딱히 반찬 걱정, 저녁 메뉴 걱정이 없다. 집집마다 우렁각시가 (엄마 미안) 활약하는 세상이다 보니 냉장고를 열면 반찬이 즐비하고, 시기별로 별미가 뚝딱 올라온다. 봄에는 봄나물, 여름엔 삼계탕, 가을엔 주꾸미, 겨울엔 김장 김치. 기껏해야 tv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를 따라 해 보겠다고 주말 마트에 장 보러 가는 부모님을 따라가서 한 번 쓰고 말 베트남 고추나 파프리카 가루를 집어넣던게 전부였다. 요리라기보다 실험에 가까웠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직접 실행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요리는커녕 집안 살림을 남의 나라 일처럼 멀리하고 살았다. 혼자 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요리의 시작은 재료 손질, 끝은 설거지이며, 부엌에 서 있다 보면 발바닥이 아프고, 출근하기 전에 챙겨 먹고, 퇴근하고 나서도 챙겨 먹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키친타월을 얼마나 낭비하게 되는지 등등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일들이 부엌에 잔뜩 쌓여있었다.  


한 주에 한 번, 내 영혼을 실어 나르는 쇼핑 카트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혼자 살면서 건강도 챙기고 돈도 아낄 겸 요리를 시작했지만 어쩐지 손에 칼이 착착 붙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준비물이다. 기초적인 장비를 구비해야 입문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다. 사야 할 게 어찌나 많던지 간장, 액젓, 설탕, 소금, 후추, 올리고당, 맛술, 참기름, 들기름... 한식 한 끼 해 먹으려면 여러 끼 분량의 양념을 한꺼번에 사야 한다는 점이 애석하지만 한 번 사면 그래도 몇 달을 지속해서 사용할 수 있으니 분하지는 않다. 실험 삼아 넣던 파프리카 가루와는 결이 다르다. 이삿날,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에 들기름까지 바리바리 싸 온 부모님이 같이 장을 보러 가자는 걸 극구 사양했다.

“나 독립했어.”
독립 초기부터 의존했다간 나중에 (여전히 반찬을 받아먹긴 한다) 부엌 바보가 될 거야.     

커다란 카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진간장과 국간장은 뭐가 다른지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엄마에게 SOS 전화를 걸었다.

“... 둘 다 사야지.”
"왜? 그럼 양조간장도 다 사야 해?"
"..."


고추장만 해도 브랜드가 어찌나 많던지 두 통을 들고 성분을 비교해 보다가 세뇌당한 광고음을 읊조리며 가장 익숙해진 브랜드를 골랐다.

‘고추장은 붉은색이니 태양처럼 강렬한 걸 골라야지.’     

설탕 앞에서도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흰 설탕, 갈색 설탕, 검은 설탕, 덜 정제한 다른 설탕까지, 얼마나 건강을 챙기고 싶고, 당도를 조절하고 싶은지, 어떤 요리를 하는지에 따라 선택지가 다양했다. 돈가스 먹으러 갔다가 히말라야 핑크 소금을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지. 솔직히 하나씩 꼼꼼하게 비교한다고 뭘 알까. 그냥 필요한 양념만 있으면 되지. 종류별로 하나씩 골라서 카트에 넣었고 처음으로 마트에서 카드 할부를 해봤다. 카트 가득 양념과 조미료를 골라 넣으면서 어릴 적 엄마 립스틱을 몰래 발라보며 느끼던 비밀스러운 쾌감과 어색함이 되살아났다.


텅 빈 부엌 선반 중 한 칸을 골라 양념과 조미료로 채워 넣어 양념 전용 칸으로 만들어 놓으니 새 옷을 사서 포장을 뜯고 옷장에 소중하게 집어넣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양념 쇼핑 이후로 꼬박꼬박 점심을 만들어 먹었고 하루 두 끼는 무리라는 판단하에 점심때 만들어 먹고 남은 요리와 엄마의 반찬을 꺼내 저녁에 먹었다. 부엌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 집들이까지 열었다.

“누가 요리하는데요?”
"내가.”
"시켜 먹을까요?"
"나 요리 잘해!"

관상에 요리가 없는 모양인지 아무도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평균만 해도 놀라 자빠지니 오히려 감사한 일인지라 아니꼽게 들리지 않는다.


연초,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는 요즘 긴축재정에 들어갔다. 책도 구매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글 쓴다는 사람이 책을 사서 읽어야 출판 업계에, 작가에게 도움이 될 테지만 일단은 나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장을 보고, 최대한 배달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앱도 지웠다. 재료 한 가지를 사도 여러 차례 응용할 수 있는지 재차 고민해 본 후에 카트에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두부를 사면 찌개, 두부 부침, 라면 재료, 유부 초밥 재료 등 최소 4가지 버전으로 응용이 가능하니 장 볼 때 단골 재료로 낙점이다. 꼭 필요한 재료만 카트에 집어넣어도 어느새 5만 원이 훌쩍 넘어버린다. 며칠 전에 대세일을 하는 대형 마트에 갔다가 1+1에 집착하며 이것저것 집어넣다가 영수증에 20만 원이 찍힌 후로 더욱더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카트를 밀면서 장을 보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정돈된 양념과 식재료 등이 늘어선 복도를 카트로 누비는 날은 늘 기대된다. 그 주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그날이 유독 지친다거나, 우울과 피곤에 시달리더라도 깨끗하고 밝은 복도로 카트를 밀고 가며 양 옆 선반에 늘어선 양념과 채소와 육류 따위에게 위로를 받는다.


사람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안정과 휴식을 얻는다. 나는 스스로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보다 여행이 좋고, 매번 다른 경험을 계획하고, 즐거움을 찾아 밖으로 쏘다닌다고 홍보하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행위는 강렬한 경험을 선사하는 한편 불안과 슬럼프도 안겨주곤 한다. 별 계획 없이 아침에 일어나 뻔한 냉장고 내부를 대충 훑어보고 애호박을 꺼내 싹둑싹둑 써는 행위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행복을 발견했다. 뻔한 행복을 찾아 내 영혼은 매주 카트에 실려 마트 곳곳을 누비며 영감을 맛보고 위로도 얻는다. 그래서 아침마다 굿모닝 쿡모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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