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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17. 2023

방앗간에서 쌀도 파는 거 아시나요?


오늘은 발레 수업이 있는 날이다. 시골마을에 발레 학원이 어디 있겠나. 차 타고 30분을 달려가야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듣는 발레 수업이 요즘 내 삶의 유일한 낙이자 사치다. 발레 수업을 듣는 날은 허둥지둥거리지 않고 새하얀 도화지 상태를 유지하다가 온통 음악과 동작으로 채워오고 싶다. 그래서 흰쌀밥만 안쳐 놓기로 했다. 냉장고에 진미채, 꽈리고추 볶음, 김장 김치, 달걀이 있으니 밥만 있어도 한 끼는 거뜬하게 넘길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이 있는 날에는 화려하게 조미료를 뿌리거나 솜씨 좋게 채소를 다듬는 여유를 부리지 못해 아쉽다. 좀체 빨리빨리 요리하지 않는 내 부족한 실력 때문이지만, 천천히 흘러드는 아침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오래간만에 만난 안정적인 아침이 도망갈까 무서워서 절로 눈치를 보게 된다.


대충 눈대중으로 쌀을 붓고 물을 틀었다. 깨끗하게 세척해야 한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쌀을 얼마큼 붓고 물을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몇 번 쌀을 씻어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물을 너무 조금 부었더니 되다만 밥이 나왔고, 물을 많이 부었더니 떡이 나왔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 때는 늘 차려진 밥상만 먹었고, 해외에선 햇반만 먹었던지라 밥솥 사용법도 익숙하지 않아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엄마, 이거 물 이만큼 넣는 거 맞나? 엄마가 손 잠길 정도랬잖아.”
“그렇긴 한데, 엄마 손보다 네 손이 얇잖아. 잘하면서 왜 그래. 잘해봐.”

 걱정으로 가득하던 엄마 목소리는 언제부턴가 놀림과 여유로 가득하다. 다행히 지금은 밥 짓는 일도 익숙하니 대충 부어도 얼추 맞다. 이래서 요리는 실전이라고 하나 보다.


‘흰 쌀만 보니 조금 아쉽네.’

잡곡밥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흰쌀밥은 맛과 상관없이 덜 건강하다고 믿는 쪽이다. 냉장고에 엄마가 챙겨준 강낭콩이 한 봉지 들어있으니 오랜만에 강낭콩 밥을 해 먹기로 했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동그스름한 강낭콩을 10알 정도 꺼내 쌀과 함께 씻었다.

‘자동세척 기간이 경과했습니다.’

밥솥을 켜니 분명 지난주에 세척했는데도 위생 신호를 보내고 있다. 분명 그저께 세척을 했는데 왜 또 이런 알림이 뜨는 건지 밥솥의 날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바쁜 아침 시간에 10분도 아껴야 한다.

‘그냥 하자.’

윤기가 흐르는 쌀을 깨끗하게 씻어서 밥솥에 안쳐놓고 예약 취사를 돌린 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마 발레 수업에 갔다 오면 맛있는 밥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방앗간에서 쌀도 판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지인에게 방앗간 쌀을 선물 받았는데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진짜 소문으로만 듣던 한국의 밥상에 올라가는 밥인가?!

“밥만 먹어도 맛있어! 쫀득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고, 달아. 밥알 모양도 예뻐.”

가래떡과 참기름, 미숫가루 말고도 진짜 쌀을 팔다니! 경산의 한 방앗간에서 공수해 왔다는 햅쌀은 먼 옛날 임금님 밥상에 올라갔을 갓 지은 밥을 연상케 했다.


어릴 때부터 방앗간은 익숙한 공간이었다. 가래떡도 뽑고, 미숫가루도 빻아오고, 참기름도 살 수 있는 구수한 마트나 다름없다. 묵은쌀로 가래떡이나 절편을 뽑아오는 날이면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뜨끈한 가래떡을 하나씩 떼어내 포장하는 부모님 곁에 앉아 길고 하얀 가래떡을 하나씩 집어 조청에 푹 찍어 먹곤 했다. 고등학교 때, 얼마나 자주 떡을 싸갔으면 반 친구들은 나를 방앗간집 딸내미라고 생각했단다. 우리 집의 방앗간 역사가 나름 깊긴 하다. 무려 30년이 넘도록 미숫가루에 들어가는 각종 곡물을 직접 배합해서 찌고, 말린 후 방앗간에서 빻아와서 아침마다 타 먹는다. 외할머니도 방앗간에서 참기름과 들기름을 직접 짜서 드시고 우리 집에도 나눠주신다. 방앗간에 참기름을 의뢰하러 가는 날이면, 모든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방앗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고 하셨다.

"힘든데 왜 앉아 계세요. 그냥 사 오세요."
“아니, 중간에 다른 걸 섞는다니께. 감시해야혀”

우리 집 미숫가루도 할머니한테 맡기고 오면 할머니가 참기름을 짜는 방앗간에서 미숫가루를 빻아온다. 알갱이가 가루가 되어 비닐에 담길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신다.

“나중에 따로 덜어가니께, 지키고 있어야혀.”


방앗간에 무슨 신비한 힘이라도 있는 걸까? 미숫가루도 직접 빻은 것이, 참기름도 직접 짠 것이, 쌀도 직접 도정한 것이 더 맛있다. 중간 상인 없이 다이렉트로 신선한 식품을 납품받아서 그런 걸까? 시간이 고여있는 방앗간의 간판과 미닫이 문을 보면 전래동화에 나오는 신령님이 특별한 기운을 부리는 게 틀림없다. 수시로 열리는 미닫이문을 타고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령의 요술이 섞인 냄새를 쫓아 고개를 휙휙 돌린다. 이미 냄새에 넘어가 버렸을 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밥 냄새가 진동을 했다. 보온 모드로 들어선 지 20분 정도 지났다는 사인이 떠 있었다. 갑자기 허기졌다. 허벅지는 뻐근했고 눈가가 나른해졌다. 보통 발레 수업이 끝나면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이 겪는 러너스 하이 비슷한 황홀함 감정이 몰려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격렬한 허기와 갈증으로 다급하게 탄수화물을 찾게 된다. 서둘러 손을 씻고 밥솥 뚜껑을 열어 증기가 피어오르는 갓 한 강낭콩 밥을 주걱으로 휘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밥 사이사이 강낭콩이 껴 있었다. 냉장고에서 각종 반찬을 꺼내서 접시에 옮겨 담고, 달걀을 꺼내 프라이를 했다. 차리고 보니 나름 3첩 반상이다. 국은 없지만 반찬이 색깔별로 줄지었다. 빨간 진미채, 노란 달걀 프라이, 녹색 멸치볶음, 화려한 김장김치, 화룡정점 강낭콩 밥까지. 이렇게 또 한 끼를 해결했다.


'취사가 시작됩니다.'

어릴 때 끼니때가 되면 압력 밥솥 돌아가던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취익취익 소리를 내는 밥솥 꼬다리는 곧 저녁식사 시간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압력밥솥에서 밥을 푸고 나면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살살 긁어내 과자처럼 오독오독 먹곤 했는데 혼자서 밥 해 먹고 살려니 압력밥솥 밥이 얼마나 귀찮은 일이며 누룽지라도 눌어붙는다면 설거지 시간이 배로 길어져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찮은 압력밥솥 대신 전기밥솥을 쓰지만 방앗간 쌀은 포기 못한다.

이제 방앗간 쌀 아니면 못 먹겠어요.

방앗간에서 사야 할 아이템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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